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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 J.D. 샐린저

by YT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딸아이와 [호밀 밭의 파수꾼]에 대해 얘기하던 중, 나의 薄한 J.D.샐린저에 대한 평가에 대해 딸의 반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녀석은 나에게 샐린저의 또 다른 책인 [아홉 가지 이야기]를 추천했었다. 샐린저의 고민과 그의 글 쓰는 방식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그에 대한 별점도 후하게 높였으며, 독서의 말미에는 또 다른 그의 저작인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를 나의 미래 읽기 목록에 추가하였다.

말 그대로 아홉 개의 단편이 하나로 묶여 있지만, 각각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아홉 개의 이야기 중 셀린저의 철학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마지막 단편 ‘테디’다. (주제의식이 노골적이라는 측면에서 문학적으로는 가장 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테디’를 읽고서 비로소 [호밀 밭의 파수꾼]의 다분히 종교적이고, 원시적인 결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서양인으로 인도 철학에 심취한 인물이다. ‘테디’에는 티벳 불교의 린포체나 달라이 라마의 환생 같은 주인공 테디가 있고, 그를 통해 윤회가 등장하고, 삶의 방식으로서의 명상을 강조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헤르만 헤세가 불교와 도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비슷하다. 아! 샐린저는 그런 사람이었다. 서양인이면서 동양적인 것에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람, 그래서 서양인들의 눈에 매우 신비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샐린저는 은둔으로 유명하고, 그에겐 어느 정도의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그의 작품과는 별개로 씌워져 있다. 하지만 우리 동양인에게 헤르만 헤세나 샐린저의 고민은 당연한 것, 인간의 업보와 같은 것으로, 이미 우리의 세포 속 DNA에 흐르고 있다. 서양의 전통에서 1900년대 초/중반의 불교와 힌두교의 철학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어쩌면 서양인들에게 삶의 대안이나 탈출구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홉 개의 단편 중 [호밀 밭의 파수꾼]과 유사한 주제의식을 보이는 것은 ‘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시대’다. 주인공의 젊은 날의 고독과 피폐함을 제목에서 피카소의 젊은 시절인 ‘청색시대’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주인공의 고독과 알 수 없는 고통과 방황은 신경증적인 휩싸임으로 나타나고, 그런 상태의 정화가 이르마 수녀의 그림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통해 마지막의 영적 체험을 통해 깨달음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호밀 밭의 파수꾼]의 단편 버전이라 할 만하다. 청색은 젊은 날의 고통과 고독이지만, 그 속에는 항상 ‘상승’으로서의 미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매우 J.D.샐린저다운 주제와 해결이다.

그리고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는 ‘Nervous’라는 하나의 단어에서 영감을 얻어 쓴 완전한 구성의 단편 소설처럼 보인다. 개인 심리적 차원의 ‘nervous’가 상대에게 가하는 엄청난 폭력을 거의 전화 대화로만 풀고 있다.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는 작지만 특별한 인연이 개인의 회복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의 다른 단편과는 달리 인간의 비참함이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보여준다는데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 외 ‘바나나 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과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는 상실감이 점점 정신병으로 발전해가는 심리를 이야기하고,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은 첫사랑의 탄생 순간을 보여주고, ‘웃는 남자’는 다소 판타지적인 느낌이 나고, ‘작은 보트’는 인종차별의 모습을 단면으로 보여준다.

[아홉 가지 이야기]에서 ‘테디’를 제외한, 여덟 가지 이야기는 개인적인 고통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J.D. 샐린저의 등장인물 중 군인이 많고, 그들의 상실이 몇몇 소재가 된다고 해서, ‘전후 미국인들의 상실감’을 다룬다고 보편적으로 확장하여 해설하는 일반적인 평론은 잘못이다. (단편의 한계 때문일 수 있지만) 샐린저의 문제의식은 사회에 있다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에 있고, 그것의 극복에 대한 고민이 소설의 주된 주제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상실감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사랑, 젊음 등)에서 주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사회문제를 다룬다기보다는 개인의 심리와 정서에 바탕을 두고, 개인 심리의 불안정함과 고통을 매우 종교적이거나, 동양적인 색채로 풀어가는 것이 J.D.샐린저다.

마지막으로 [아홉 가지 이야기]를 읽으며 발견한 J.D. 샐린저의 탁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아홉 개의 단편에서 다섯 편은 - ‘바나나 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작은 보트’,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 -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 전개가 대화로만 처리된다. 마치 티키타카 연극을 보는 인상이다. 대화로만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뭔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 인물들의 배경, 정신, 상태가 묻어나야 하고, 주제 의식과 연결된 마음/정서의 드러남도 일상적인 대화만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대단한 필력이 요구되는 고수의 작업처럼 보인다. 소설에서는 대화와 더불어 배경과 심리에 대한 전지적 시점의 적당한 묘사가 일반적이다. 묘사 위주의 소설은 어떤 건축물을 가리던 덮개를 걷어내어 조금씩 전체 모습(주제 의식)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라면, 대화로만 된 소설은 빈 공터에 각각이 다르게 생긴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서 전체 건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보다, 쌓아서 존재를 만드는 것은 매우 커다란 숙련의 차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대화로만 쓰는 소설)은 독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것으로 그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읽기를 요구한다. 처음부터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하고, 서서히 변화하거나 증폭하는 등장인물의 심리와 벌어지는 상황을 따라가야 마침내 작가의 의도와 주제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대화로만 된 소설은 클라이맥스가 매우 정제되어 나타나서 다 읽었을 때 조금 실망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대화체 소설은 폭발하듯 터지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조그만 구멍으로 바람이 슬며시 빠지는 풍선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독자에게 주제의식에 대한 긴 여운을 줄 수 있다. 왜냐면 그 주제 의식이 독자 자신이 치열하게, 정신 번쩍 차리고 따라갔던 일상(대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즉 독서의 집중도가 높기 때문에, 정제된 상황에서도, 보다 긴 여운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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