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먹성

by YT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탄자니아 출신의 난민 작가 ‘압둘라작 구르나’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스웨덴 한림원은 ‘식민주의의 영향과 난민 운명에 대한 단호하고 연민 어린 통찰’을 선정 사유로 발표했다.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서 직접 소설을 읽어볼 기회는 없었지만, 나는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체 게바라를 떠올렸다. 미국의 턱 끝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심지어 세계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쓸쓸히 죽어간, 어쩌면 서구 자본주의의 1호 수배범인 체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다양한 색의 T셔츠에 인쇄되어 번쩍이는 네온 광고로 숲을 이루던 뉴욕의 밤을 활보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흔한 체 게바라 T셔츠를 볼 때면, 늘 그 아이러니함에 당황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엄청난 먹성에 놀란다.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당시 서구사회의 엄청난 찬사를 받았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식민지 시대 남미의 비통한 역사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게 反 서구적인 것이다.

제3세계 작가의 작품이 서구의 주목을 끌고, 노벨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지금까지 서구사회에서 보지 못한 형식이고 내용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에게 서구적인 형식과 내용은 어느 정도 정체에 이른 것처럼 느껴지지만, 제3세계 작품은 분명 다름과 또 다른 에너지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인들에게 제3세계의 모습은 이국적이고, 아름답고, 서양의 고통과 정체에 대한 대안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성찰과 동양에 대한 깊은 지적 이해에 바탕을 둔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 원주민들을 대하던 시선과는 그 온도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는 따듯한 시선이다. 이것은 깔로 보는 콜럼버스의 시선이 아니라 나란히 보는, 동등한 시선이다.

지구가 한 덩어리로 느껴지는 지금, 자본의 논리가 인간사회를 운영하는 엔진이 된 지금, 자신을 찌르는 가시까지 먹어 버리는 먹깨비 덕분에 3세계 작가의 작품도 유행으로 이어지고,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 ‘무에! 이념이란 말인가? 다 쓸데없는 것일 뿐이다.’ 이념과 신념은 자본의 판 위에서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모든 것은 돈의 내부로 빨려 들어간다.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얼어버린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그에게서 벋어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것은 여전한 침략이고, 식민주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 먹깨비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바이러스도 숙주를 살려주는 현명함이 있는데, 그는 술에 취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며 첨벙첨벙 진창을 위태롭게 뛰어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홉 가지 이야기] J.D. 샐린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