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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 마이클 폴란

by YT

지난 추석 즈음, 증조부 묘 벌초를 위하여 시골에 갔었다. 증조부 묘 앞쪽으로는 꽤 큰 규모의 과수원이 있는데, 수확 중이거나, 곧 수확을 기다리는 다 여문 사과가 주렁주렁 달렸었다. 하지만, 사과나무의 모양이 어릴 때 봤던 기억 속 사과나무와는 달랐는데, 사방으로 가지를 펼친 나무의 형상이 아니라, 내 키보다 약간 크게, 길게만 자랗고, 사과 역시 위아래로, 무릎 높이에서부터 나의 머리 정도까지 직선으로 달려있었다.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로로 빼곡하게 열린 사과가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이것은 ‘기둥형 사과나무’로, 수확의 편의성과 단위 면적당 산출을 높이기 위하여 몇 년 전부터 과수농가에서 활발하게 도입한다고 한다. 커다란 사과들이 조금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위아래로 빼곡하게 달린 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여신상(다산의 상징으로 유방이 여럿인 여신)과 비슷하고, 잎만큼 많이 달린 사과는 너무 노골적이며, 불균형의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은 이렇게 자연에 개입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것이고, 거꾸로 자기 종의 번식을 도모하는 식물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결론으로 작가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은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4가지 식물을 대상으로 하는데, 처음 ‘사과’ 편에서는 흥미로운 미국인, 미국 초창기 사과 과수원의 개척자 ‘조니 애플시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궁극적으로 종의 다양성에 대한 찬미가 이루어진다. 두 번째 ‘튤립’에서는 인간의 욕망으로 파국으로 치닫던 네덜란드와 터키의 역사적 사례를 소개하고, 튤립의 관점에서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 종의 확장을 이어갔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세 번째 ‘대마초’에서는 작가의 대마초에 대한 우호적인 모습이 보이고, 198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대마초에 대한 단속과 그것의 회피로 실내로 들어온 대마초 재배의 모습을 인간의 욕망 관점에서 이야기하며 니체의 관점과 디오니소스를 동원하여, 환각 체험의 역사적인 분석과 의의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대마초’ 장은 다소 작가의 탈선으로 보이는데, 나로서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장으로 환각이 진짜인지, 환각이 깬 상태가 진짜인지라는 매우 장자적인 시각을 사용하고 있다. 읽는 내내 그의 독특한 관점에 대해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 번째 ‘감자’ 편에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우리는 매일매일 음식을 통해 식물과 관계하지만, 그 식물에 가해진 인간의 욕망과 그것으로 인한 변형이 다시 우리,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인식 못한다. 마이클 폴란이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공진화’로 식물과 동물은 욕망을 공유하며 같이 진화하는 것이고, 지구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동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동물보호’라는 가치 문구가 보편화될 정도로 어느 정도의 인식이 있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고통이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보편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도덕의 이슈로 올라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식물에 대해서 그러한 관점은 매우 희박한 편이다.

그런데 어쩌면 식물이 더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에 중요하고, 동물이 살 수 있는 바탕을 주고 있는지 모른다. 전 세계 모든 이들의 주식은 식물이고, 인간을 치유하는 대부분의 약은 모두 식물에서 추출된다. 이렇게 아낌없이 주는 식물이 무너진다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도저히 삶을 버텨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동안 인간은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식물과 동물이 사는 세상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아왔다. 사과를 더 달콤하게 만들어왔고, 더욱 아름다운 튤립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감자에 이르러, 유전자 변형에 이르러 인간은 선을 넘어버렸다. 신(GOD) 인체 하지만 너무나 어설픈 인간일 뿐이다. 유전자 변형의 대가가 어떻게 다시 우리의 뒤통수를 때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헛똑똑이일 뿐이다. 이 책은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인위적인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선택은 식물에게도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을 때는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더 큰 자연의 행위에 맡기라는 것이다.) 나의 특정 행위는 언젠가 우리의 목숨을 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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