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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Dec 26. 2021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

 영화가 보여주는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인류가 좀비로 변하거나, 인간이 발명한 로봇이 각성하여 인류를 학살하거나, 알 수 없는 소행성이 갑자기 지구로 돌진하거나, 급격한 환경변화로 빙하기로 퇴보하거나 혹은 해수면이 상승하거나, 아니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하여 신에 의한 심판의 날이 오거나…, 영화에서는 이런 다양한 외부요인이 개별 인간의 상황과 욕망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좀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영화가 보여주는 다양한 인류멸망의 시나리오 중, 내게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멸종 혹은 리셋(Reset)이다.

개인적으로 핵전쟁 시나리오의 가설을 좀 더 현실성 있게 보는 것은 근래 몇 년 동안 돌아가는 국제 정치 상황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 십만 대군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해 나토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다. 중국은 대만 이슈로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러시아와 공조하고 있다. 중동의 신생국 UAE는 재래식 무기 수입에 열을 올리고, 사우디는 그들의 에너지 패권을 군사패권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열을 올리고 있다. 전쟁 청정 국일 것 같은 호주는 최근 군사 및 무기 문제로 프랑스와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다. 1980년대 말 소련 해체 이후, 약 30년간 전 세계는 세계의 경찰 미국의 패권에 의하여 통제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트럼프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슬로건 ‘America First’는 역설적으로 절대자로서의 지위 하락의 징후를 의미한다. 낮아진 미국의 지위에 강력한 대안으로 중국이 부상하고, 그 균열의 틈에서 각자의 국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국제 정치가 좀 더 다원적인 상황으로 변해가면서, 핵보유국들 간의 분쟁이 조정 가능한 수준을 넘어간다면 인류에게 재앙이 될 핵전쟁의 발발은 당연한 귀결이 될 것이다.

핵전쟁 시나리오에는 우리 모두가 간과하거나,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핵전쟁은 마치 모든 인류가 깔끔하게, 단 몇 번의 폭발로 모두 평등하게 같이 소멸할 것이라는, 즉 ‘모두가 한방에 죽는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저 멀리 번쩍이는 빛이 보이고, 인류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것은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의 시간 축약 기법일 뿐이다. 내가 생각할 때 전쟁은 그렇게 명확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한동안 미사일의 공격으로 도시 기능은 서로 마비될 것이고, 사람들은 전기가 끊어지고, 식품이 부족한 상황에 놓이고, 약탈과 범죄가 늘어날 것이고, 지상군이 투입되어 마치 2차 세계대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소총과 박격포, 탱크 등의 재래식 무기가 등장하는 시가전과 고지전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고, 감정을 통제 못한 세력에 의해 핵의 사용이 이루어지지만, 핵 사용 역시 초반에는 한 개, 두 개…, 제약되어 이루어질 것이고, 마침내 모든 것이 퍼부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몇몇 중요한 시설과 사람들에 집중될 것이고, 여전히 살아남은 많은 인류는 끔찍한 고통,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에서 ‘매드 맥스’에서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핵전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핵전쟁은 인류가 가진 재래식 무기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진행될 것이고, 핵 역시 집중되어 사용될 것이다. 모든 것이 하얀빛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난하고 끔찍한 과정을 거치며, 지리멸렬한 상황이 몇십 년 혹은 몇 백 년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끔찍한 고통과 몸과 정신의 피폐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핵전쟁이다.

1차,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집단지성은 전쟁의 끔찍함에 각성하여 ‘국제 연맹’과 ‘국제 연합’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현재 UN은 유명무실하여 어떤 행동과 규제력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돈에 코가 꿰어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단체로 변질되는 모습도 보인다. 아직 우리에게 지구 단위의 집단 지성은 작동하지 않는 듯하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범 지구적 고민은 몇 년 혹은 십몇 년을 넘어서지 못하는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처럼 외계인의 침공이 있다면, 지구의 공통 적이 출현하다면 지구 차원의 지성이 작용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인접 도시 국가와 수시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그들은 하나로 모아진다. 글로벌, 지구촌, 세계시장 같은 통합을 의미하는 표현은 우리 인류가 아직은 통신, 무역 등의 경제적인 영역에서만 통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여전히 인류에게는 인종의 문제, 종교의 문제, 민족의 문제를 포함하는 정치적 현안들이 있다. 금방이라도 세상은 통합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상황은 만만치 않고, 매우 요원해 보인다. 우리 인류는 여전히 분화, 산재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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