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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an 04. 2022

풍(風)

 이덕화 씨는 극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해도 그만의 스타일이 있다. 최근 사극에서 보여주는 일관된 모습뿐 아니라, 그의 젊은 시절, 심지어 하이틴 영화에서 조차 그만의 스타일, 이덕화 풍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다. 박진영 씨가 작곡하는 모든 가요는 비록 가수가 달라도 비슷한 느낌,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특유의 스타일을 가진다. 화가 박수근의 그림도 비슷하다. 안개 낀 듯 분명하지 않은 윤곽선에는 지난한 삶의 우수가 서려있다. 이러한 효과는 그의 두텁게 칠하는 페인팅 방식으로 창조된 것들이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도 역사에 비판적 칼날의 단면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특정한 조정래 풍을 느낄 수 있다.

이 風은 내가 생각하기에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어린아이의 그림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가질 수 있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어린아이의 그림이 피카소의 그림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일회성의 단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풍은 오랜 기간 생각과 연구, 실행을 통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 연예인 솔비 씨의 화가 데뷔와 그림을 두고 설왕설래가 오간다. 어느 비평가의 비평에도 있었지만 솔비 씨는 계속된 회화에의 정열과 작업을 통해 그녀만의 풍을 만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그녀를 충분히 프로페셔널 화가로 대접해야 한다. 내가 소설을 쓰고자 할 때 지도 선생님은 ‘자신의 금기에 대해 글을 써보라’는 숙제를 던진 적이 있었다. 이 말은 나에게 여전히 붙들고 사는 화두이고, 깨달음의 순간은 계속 지연되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 표현의 의미가 ‘자신이 계속해서 써갈 수 있는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만들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풍은 일정 기간 동안 끌고 갈 수 있는 지속성이지만, 그 외에도 분야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미술사에서는 1900년대부터 회화, 조각 등의 기존 분야에 머물지 않고 비디오, 퍼포먼스, 설치 등 미적인 것과 관계된 것이라면 한정하지 않고 뻗어나갔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방울, 나무뿌리, 물감 자체, 자신의 몸등 어떠한 제약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1900년 이후부터 화가는 자신의 미적 작업을 위한 소재의 개발이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백남준에게는 비디오가 그의 생각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고, 오노 요코에서는 퍼포먼스가 되었다. 화가 김창렬은 물방울을 그의 뮤즈로 삼았다. 이중섭에게는 소가 작업의 중심에 섰다. 이런 소재적인 부분과 그 소재가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주제의식은 하나가 되어 드디어 그의 풍을 만든 것이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문체가 미술에서의 소재 같은 역할을 한다. 쉼표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있을 수 있고, 대화로만 구성되는 담백한 문체가 있을 수 있으며, 유머와 해학을 담은 문체가 있을 수 있다. 소설가 성석제는 그의 주제의식과는 별도로 가볍고, 웃음과 미소를 머금은 문체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런 독창적인 소재와 문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풍을 만들 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 의식일 것이다. 주제의식은 흔하게 정치적일 수도, 심리적인 것일 수도, 관계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이 역시 소재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주제의식 속에는 그만의 독특한 관점, 시각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창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풍이 만들어진다. 독창적인 시각을 가진 주제 의식이 정해지고,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론이 동원되고, 한동안 지속성을 가질 때 이것을 우리는 그 작가의 풍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작가의 풍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마추어와의 구별 만을 말할 뿐, 예술가로서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앞서 밝힌 ‘풍’을 만드는 요소는 몇 개의 필요조건일지 모른다. 즉, 그를 작가 혹은 미술가로 불러줄 수 있는 미니멈 레벨, 자격증 같은 것일지 모른다. 진정한 창조와 예술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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