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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an 08. 2022

주술과 읽기

 23577 - 30년도 넘었지만 나는 아직 대학교 입학을 위한 학력고사 수험번호를 기억한다. 정확하게 그 번호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고, 선택된 숫자의 ‘도리짓고땡’식 조합으로 즉, ‘이삼오 칠땡’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 수험번호를 받고, 시험에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었던 나는, ‘이번에는 합격할 거야!’라는 강한 믿음을 가졌다. 도리짓고땡에서 칠땡은 높은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 칠땡의 마술 때문인지 나는 그해 대학에 붙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땡잡기에 심취해 있었다. 그 당시 자동차 번호는 다섯 개의 숫자로 이루어져 있어서(요즘은 6,7개의 숫자가 기본), 세 개의 숫자로 메이드를 만들고 두 개의 남은 숫자로 패를 겨룰 수 있는 구성이 되었다.

내 수험번호 이야기는 일종의 주술과 같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징크스나 미신 같은 매우 과학적이지 않은 인지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야구 경기를 하러 가는 날 장례 운구차를 보면 꼭 그날의 경기를 이긴다는 야구 감독이 있었고, 어머니가 부자 되라고 넣어 준 1달러 지폐를 늘 지갑에 넣고 다니는 친구도 있다. 토속적인 것을 넘어 외국의 미신에 따라 13일의 금요일에는 왠지 술 약속을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엘리베이터에 4층이 없는 것은 이러한 징크스가 세력을 얻어 강력한 집단적 주술이 된 경우이다. 

외부 자극에 대한 인지와 인식은, 그것이 표현된다는 측면에서 ‘읽기’로 은유된다. 애초에 읽기는 책을 읽는 것이었지만, 인지와 결합하며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하고, 출렁이는 주식 그래프를 읽으며, 엉망진창인 조사 데이터를 읽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 곳곳에 숨어있는 주술과 마술은 ‘읽기’를 과학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이나 공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심한 경우 읽기는 망상이 된다. 읽기는 주체의 인식 행위를 뽑아내는 단계이므로 아무리 제대로 읽어도 그것은 다소간 읽는 이의 ‘희망’과 ‘주문’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현대에서 조차 읽기는 인지와 과학혁명 이전에 인간이 품고 있던 인간의 원형으로서의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품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우주시대에도 샤머니즘은 인류의 피를 통해, DNA를 통해 더욱 심하게는 Bit 속에 심어져 전승될지 모른다.

우리는 작가를 떠난 TEXT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작가의 의도는 더 이상 권위를 가지지 못하고, 한 독자의 의견과 같은 위상을 공유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저작권의 보호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부분일 뿐,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다만 또 다른 다양성의 추가가 만들어질 뿐이다. 이제 의미의 중심은 없고, 다양성 자체가 목적이 된다.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이런 다양성의 출현을 불확정성과 확률이라는 새로운 체계로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성의 세상에서, 과학과 논리의 권위가 무너진 세상에서 주술과 미신이 당당하게 (주류는 아니더라도) 인류 삶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주술과 미신은 인류의 원형이고, (사실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세상에서, 다양성의 저택에 당당히 초대받을 수 있는 우리의 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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