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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an 27. 2022

읽기의 자유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메리 보이스/ 독서 중

212 페이지 중 – 이를 행하기 전 읊어지는 절에 따르면 숭배자들은 하오마를 “녹색의 존재”로 호명하며, 취하게 해 주기를 간청하며 그에게서 힘과 승리와 육체의 건강을 요구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전신에 힘을 주며, 모든 종류의 도취와, 두 발 달린 것이든 네 발 달린 것이든 어떤 적이라도 물리칠 능력을 준다. 하오마의 별칭 중 하나는 베레트라잔, 즉 “승리의”이다. 또한 적군을 무찌르는 것을 보장받기 위해 하오마에게 야스나를 거행하는 것이 조로아스터교도에게도 여전히 관례였다.


나의 읽기 - 다신교 전통에서 하오마는 힘과 승리를 약속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다신교적 형태가 좀 더 정비된 조로아스터교에서도 반복된다. 하오마는 식물이고 으깨어 즙의 형태로 의례에 사용되므로 당연히 녹색일 것이다. 과거 페르시아의 다신교적 전통에서도 등장하지만, 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생명의 나무’는 세상 만물의 탄생, 생명, 활력과 관계한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녹색은 강한 힘의 기원으로 상징되었고, 더욱이 이것은 인도/유럽어족의 전통으로 서구의 오랜 인식이었던 듯하다. 즉 서양인들에게 ‘힘=녹색’이라는 인식은 그들의 DNA를 따라 피를 통해 전승되었을 것이고 이런 색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슈렉과 헐크의 이미지로 재생된다.


 나는 ‘나의 읽기’에서 원본 TEXT를 내 마음대로 읽었다. 원본의 논의를 고대에서부터 현재로 늘였고, 내가 대충 알고 있는 생명의 나무를 추론의 길 위에 심었고, 힘을 녹색으로 만듦으로써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재단해버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아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언어학적인 기원을 찾아가는 의미 추론, 검증된(신빙성이 확보된) 여러 관련 서적의 공통된 부분을 취하는 태도, 밝혀진 같은 민족/어족의 유사성에 기반한 인도 리그베다와의 엄정한 비교로 구성된 학술 서다. 저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같은 학문을 하는 동료들의 연구까지 인용하고 평가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조로아스터교의 역사]는 ‘인용 목록’이 전체 페이지의 3분의 1에 이르는 과학적 탐구/서술 방법에 기반한 철저한 사회과학 논문이다. 이런 책에도 TEXT 읽기의 자유는 인정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더 나아가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같은 과학 논문에서도 TEXT 읽기의 자유는 인정되는 것일까?

 이런 학술논문의 독서에서 독자의 읽기는 대부분 저자의 논리와 의도를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칫 과학 논문에서 ‘읽기의 자유’는 ‘오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부분적이거나 방편적인 표현, 좀 더 엄밀하지 못한 단어의 사용에 성급하게 뒷다리 잡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읽기의 성급함, 오류를 재료로 독자는 부실한 城을 쌓을 수 있다. 최초의 오해는 또 다른 오해로 이어지는 통로와 바탕이 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은 하부구조가 썩은 불안한 성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과학책들의 읽기는 매우 조심스럽다. 어느 부분의 오해는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는 주제에 대한 독자의 저자에 대한 내공의 열위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엄정한 학술 논문이라 하더라도 TEXT 읽기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TEXT에 내재한 불완전의 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독자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읽기의 자유 때문이다. ‘TEXT 속에 내재한 불완전의 가능성’은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우연이 발견한 다양한 사례들을 알고 있다. 팬데믹 초기, 우리는 각종 다른 용도의 약들이 코로나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대대적인 실험을 진행했었다. 에볼라 치료제가 실험되었고, 동물 구충제가 효과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유전자 정보가 해독되는 요즘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느 나사가 이 구멍에 맞는지 하나하나 맞춰보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틈은 있고, 이 틈(오류)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고, 지금까지 왔던 길을 수정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읽기는 마치 책과 나의 교류나 대화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일방적인 작업이다. 나의 입장에서 읽기는 온전히 나의 자유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글자만 읽는 시늉을 할 수도 있고, 수박 겉핥기 같은 얄팍한 독서를 할 수도 있고, 책 속에 침잠하여 마치 잠수 같은 독서를 할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독서 행위에서 대상은 철저하게 나의 기존 관점에 의하여 재단된다. 이것이 읽기의 본질이다. 이런 읽기의 자유를 통해 책의 판매부수만큼 다양한 TEXT가 만들어진다. 2차로 만들어진 TEXT는 그 신뢰성을 떠나 우리의 삶을 그만큼 더 확장한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에 기반한 논리적으로 잘 짜인 TEXT라 하더라도 읽기의 자유는 보장되는 것이고, 그 자유는 나름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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