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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an 26. 2022

내 몸의 주인은 나인가?

 몸이 아플 때, ‘나는 내 몸의 주인일까?’하는 의심이 든다. 도무지 정신 승리, 고결한 의지란 없어 보인다. 갑자기 열이 오르고, 몸 어딘가가 콕콕 찌른 듯 쑤시고,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면 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몸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나는 마치 애처롭고 불쌍한 짐승이 되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의 주인일까? 

 고대 노예들의 몸은 그들 주인의 것이었다. 목숨을 포함하여 노예의 모든 것은 그 주인의 것이다.  노예제가 폐지된 21세기 현대에서 조차, 우리는 부와 권력의 문제로 인하여 단호하고 자신 있게 ‘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확신을 강하게 말할 수 없다. 어떤 경우 내 몸은 상사의 것이고, 조직의 것이고, 갑의 것이고, 국가의 것이기도 하다. 고대에는 이런 소유의 문제가 단순하고 순박하게 몸에만 머물렀다면, 역사를 거치며 점점 몸의 소유는 정신 혹은 영혼의 소유로 확대되었다. 종교는 영혼의 소유를 시도했고, ‘가스 라이팅’이라는 단어는 타인에 의한 정신의 소유를 표현한다. 

 본질적으로 몸의 주인을 묻는 질문은 한 인간을 ‘몸과 정신(영혼)’으로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명의 미명 아래 몸은 늘 정신(영혼)에 비해 금욕이라는 이름으로 학대받았다. 어떤 경우 정신(영혼)은 내 몸의 주인으로 간주되었고, 철학/종교적으로 정신만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몸은 분명한 실체에도 불구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이후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몸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본질과 부수적’(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분을 통해 이제는 보다 고차원적으로(교묘하게) 차별받고 있다. 플라톤 이래 많은 형이상학에서 정신의 정제와 벼림을 이야기할 뿐 몸이 주인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도스토옙스키 [악령] 속 키릴로프의 결심은 내 몸에 대한 나의 소유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 모른다.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자유 – 나의 의지에 따라 내 몸을 처분한다. 그것은 진정 내 몸의 주인은 나임을 표현한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반대한다.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 기독교의 이런 자살에 대한 교리는 내 몸의 주인이 신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나의 몸을 영혼을 통해 대리 통치한다. 단순한 구도로 신은 영혼을, 영혼은 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안락사 문제와도 관계한다. 자살의 금기는 어쩌면 종교적, 사회적으로 집단 터부로 형성된 듯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뉴스에서 나오는 외부요인에 의하여 등 떠밀려, 벼랑에 선 자살과는 달리, 단지 나의 몸과 관계할 뿐인 순수한 자살은 외부적인 영향요인이 없이 자유의지에 의한 자살을 의미한다. 이 경우라면 몸은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닐까? 내 몸은 나의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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