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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an 16. 2022

100년 전 소설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를 읽는 내내 ‘100년 전 소설이지…,’를 되뇌며 스스로를 쓰다듬으며 위무해야 했다. 이런 합리화와 자기기만이 없었다면 나는 [달과 6펜스]를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파괴하려다 감동되어 멈추는 장면에서는 토가 쏠렸고, 눈이 먼 채 자기 영혼의 작품과 마주 앉은 스트릭랜드의 모습을 상상하며, 속으로 서머싯 몸에게 욕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우리 선조가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1919년 작품이다.

[달과 6펜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리감’이다. 서머싯 몸 자신인 화자와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소설의 기간 동안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다. 소설의 후반부는 스트릭랜드의 지인들의 구술과 설명, 그리고 화자의 상상을 덧대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직접 주인공과 만날 때조차 화자의 일방적인 감정이 부어지고, 주인공의 결심, 행동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심리는 화자의 상상으로 처리될 뿐이다. ‘작품 해설’에서는 이 거리감이 예술가의 신비로움을 더 증폭하여 전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미화일 뿐이다.

내가볼 때 이런 거리감은 실제 사건에 대한 르포와 허구인 소설의 어딘가 애매한 중간점에 [달과 6펜스]를 위치시킨다. 서머싯 몸은 개인적으로 자신보다 한 세대 정도 앞선 고갱의 삶에 감명을 받았고, 이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실제 타히티 섬에 답사여행을 하기도 했다. 서머싯 몸은 이렇게 자신이 여기저기 취합한 사실과 그 당시 고갱에 대해 서서히 불어오던 미술 평단의 재평가 작업을 적당한 선에서 버무렸다. 완전한 르포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도 아닌 애매한 것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 애매함을 창조적인 새로운 영역의 개척으로 치켜세워 줄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서머싯 몸의 쓰기가 지극한 상투성에 메여 있는 듯 보인다. 스트릭랜드의 성격적인 결함에 대한 합리화, 블란치의 갑작스러운 사랑과 자학, 스트로브의 성자 같은 모습, 마치 귀머거리인 베토벤을 연상하는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모습, 대부분의 구성과 인물의 태도가 마치 오래전 거리를 떠도는 유랑 극단의 연극 스토리와 닮았고, 무성영화 시절 충만한 감정과 체화된 희로애락의 고통을 관객에게 쏟아내던 변사의 나레이션과 닮았다. 더욱이 이런 상투적인 감상이 서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화자와 주인공간의 거리로 인해 화자의 일방적인 쏟아냄으로 드러난다.

서머싯 몸은 고갱의 작품과 고갱을 동일화하였다. 그래서 (그가 읽은) 미술 평단의 고갱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주제의식, 지향점 그리고 고갱의 작품 창작의 의도는 고스란히 스트릭랜드의 성격과 심리에 대한 묘사로 전이된다. 일반적으로 고갱의 작품을 정의하는 ‘상징–관념적-영혼-원시성’은 모두 스트릭랜드라는 인간의 성격으로 덧씌워진다. 하지만 그런 동일화 작업도 서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스트릭랜드를 변명해야만 하는) 화자의 생각과 상상을 통해 이루어질 뿐이다. 나는 여기서 혹시 서머싯 몸은 얄팍한 고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구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달과 6펜스]는 1919년 작품이 아닌가?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나는 [속 달과 6펜스]를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달과 6펜스]를 비튼다면 그 작업의 주인공은 ‘더크 스트로브’가 될 것 같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빰을 내미는 마치 성자 같은 인성의 스트로브. 그는 서머싯 몸에 의하여 구제되지 못하고 바보로 100년 넘게 [달과 6펜스]에서 살았다. 전지전능한 서머싯 몸은 스트로브에게 ‘천재적인 심미안을 주었지만, 놀림만 받는 늘 열등한 미적 재능’을 주었다. 머리는 뜨거운데,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손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스트로브, 그의 스트레스와 고민은 스트릭랜드의 그것보다 더 커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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