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T Feb 05. 2022

만약 다양성이 진리라면…, (네 가지 작은 생각들)

메리 보이스의 [조로아스터교의 역사]를 읽고

보르헤스의 세상처럼 만약 다양성이 진리라면…, 일신교보다는 다신교가 진리에 더 가깝다. 종교의 일신교적 현상은 제약과 억압 부당한 권위가 길게 시간 속에 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성이 진리인 시대에 사이비에 대한 단죄나, 모아짐에 대한 강요는 반동이다.


조로아스터는 그의 나이 서른에 계시를 받고 전도를 실시하지만, 10년 동안 그의 사촌 1명을 신자로 만든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카비(왕) 비스타쉬파의 애마의 병을 고쳐주면서 전도하게 되어 비스타쉬파를 타고 승승장구를 이룰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체의 탁월한 교리 혹은 신적인 영험함만으로 확장된 경우는 없다. 기독교는 로마의 등에 올라타고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고, 이슬람교는 메디나 쪽 부족세력을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눈덩이를 굴릴 수 있는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불교 역시 중국의 강력한 왕조와 결합되면서 우리나라와 동남아시아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다반사로 벌어졌다. 종교의 매우 환상적이고, 신적이며 오묘한 진리는 칼등에 탔을 때만 빛을 발하니, 매우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결국에는 철저히 선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최종 승리하기에 지금의 고난은 일시적인 것으로 우리는 계속 착하게 착한 영을 키우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현대 종교의 내세와 구원에 대한 교리인 ‘현재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내세의 안녕을 누리려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접근 방식이 다르다 조로아스터교는 긍정의 접근을 한다면 후자는 부정의 접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 승리의 결과를 아는 순간 악에 대항하던 인간과 신은 게을러지는 것이 아닐까? 이미 결과를 알고 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싸움이 빨리 해결되지 못하고 몇 천년 동안 늘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좀 더 절박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로아스터교는 너무나 낙천적인 긍정의 교리는 아닐까? 


조로아스터교도에게 순결의 원칙과 정화 의식은 감히 입교를 겁낼 만큼 너무 부담스럽다. 마치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에서 타일의 금을 밟을 수 없는 잭 니콜슨의 강박감을 연상시킨다. 조로아스터교도에게 순결 법은 너무나 강력해서 마치 일반적인 도덕 항목은 뒷전으로 밀린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세세한 순결과 정화의 규정은 후대로 오면서 사제 계급의 의도에 의하여 강화되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다신교와 일신교, 그리고 이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