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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Feb 07. 2022

[성]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소설은 TEXT의 직접적인 지시를 넘어, 다양한 읽기와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비록 1900년대 초반에 출판되었지만 매우 현대적인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후반 포스트 모더니즘의 광풍이 불어올 때, 카프카는 그 물결의 선두에 세워졌다. 특히 미완성의 마지막 저작 [성]은 – 뒷부분 작품 해설에도 잘 정리되어 있지만 - 종교적,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적, 전기적, 사회학적, 포스트 모더니즘/후기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이런 다양한 해석들은 [성]이라는 TEXT 자체에서, 카프카의 개인적인 삶에서, 그리고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에서 혹은 이 모두를 혼합한 복합적인 논거에 준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의 주장이 맞다, 틀리다의 문제는 아니며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를 지니는 또 다른 TEXT가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성]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이 다양한 해석을 더욱 부추긴 측면도 있어 보인다. 카프카의 절친이며, 사라질 뻔한 상황에서 [성]을 구해낸 막스 브로트의 종교적인 관점은 만약 (그의 언급대로) 결말이 있었다면 더욱 힘을 받았을지 모른다.

나는 2015년 초판 발행된 창비사의 창비세계문학 42 [성]을 읽었다. 다른 출판사의 다른 판본이 구체적으로 어떤지 모르겠지만, 창비사의 판본은 본문의 하단에 몇 안 되는 주석이 있는데(주로 등장인물 이름의 언어적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도대체 여긴 어딘? K는 누구? 왜 다들 이러지?라는 의문이 안개처럼 나의 독해를 방해할 때, 아직 카프카의 언어에 익숙해지지 못한 어둠 속에서 창비사의 몇몇 하단 주석은 나를 ‘종교적인 독해’로 이끌었다. 그 후 나의 독서는 ‘종교처럼 생긴 돌’을 찾는 것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다가 점점 관청과 관리들에 대한 묘사를 접하면서 점점 사회학적인 해석을 추가하게 되었다. 나의 해석 역시 정확하게 이거다!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사회적인 관점으로 흘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K의 직업인 ‘토지 측량사’는 히브리어 발음의 ‘메시아’와 유사하다고 한다. (9 페이지) 그래서 K는 현세에 내려온 예수가 된다. [성]은 예수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 마을에 도착한 K는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는 예수를 상징한다. 막스 브로트의 종교적 분석에서 ‘성’은 하늘나라(천국)의 상징이고, 관리들은 천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성은 상징적인 모습만 있을 뿐,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은 하늘나라를 상징하지만, 현실 속 인간(심지어 관리조차도) 중에서 이곳을 정확히 방문한 사람은 없다. 성을 왕래한다고 하는 심부름 꾼인 ‘바르나바스’ 조차 (그의 누나 올가의 표현에 의하면) 그곳이 성인지, 사무국인지, 사무국의 접견실인지 의심한다. [성]에서 진정 중요한 공간은 ‘헤렌호프’다. 이곳이 바로 예수가 방문했던 예루살렘의 성전이다. 프리다와 만나며 K가 조그만 공간으로 들여다본 곳은 지성소가 된다. 이 지성소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만나고 싶어 하지만 만날 수 없는 클람(Klamm)이 있다. 그리고 헤렌호프를 중심으로 민원을 해결하고 활동하는 비서와 하인, 관리들은 예수가 방문했을 당시, 바리새인 사제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업무처리는 엉망진창인 것이다.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일반 민원인들을 휘두르는 존재, 그들이 바로 사제 계급, 관리와 비서들과 그 비서의 비서들인 것이다. 그리고 여주인과 프리다는 마치 아폴론의 신전에서 취한 채 신탁을 읊어주는 시녀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K는 메시아로써 이들에 대항한다. 하지만 아직 그는 자각이 없다. 부딪혀가면서 점점 그는 자각을 획득할 것이고 예수가 되어갈 것이다. K의 좌충우돌 여정은 예수가 율법학자들인 바리새인들에 대항하는 투쟁의 모습과 닮았다. 그는 비서의 심문과 여주인의 협박과 학교 선생의 핍박을 견뎌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투쟁한다. 한스와의 대화에서 K는 고향에서 ‘쓴 약초’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자신이 어느 정도 치료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치유능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K에 앞서 사제 권력에 대항하는 바르나바스의 가족은 예수에 앞서 진리를 알고자 했던 세례 요한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고, 결국 예수의 투쟁을 같이 실천하는 12 사도의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결국 K는 소설의 전반부의 작은 구멍으로 봤던 클람이 자신임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보르헤스가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에서 말하는 구도 소설의 전형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지난하게 그려지는 K의 투쟁 대상은 ‘이상하게 현혹되어 있는’ 마을 전체다. 프리다의 처세에서 보이는 것처럼, 마을 전체는 합리적인 근거나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 없이 편견과 상상으로 모든 공상을 쌓아가고, 스스로 관리들을 숭상하고, 거기에 반대하는 이웃을 집단으로 따돌린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독재적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 마치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 이루어진다. 이것은 일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K가 마을에 도착하기 전 오랫동안 이미 그들의 몸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직접 소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Gate Keeper로써 비서와 관리 계급을 만든 것은 바로 마을 주민 전체가 된다. 이 와중에 정치적인 수완을 통해 개인적인 권력을 획득한 사람들이 두 여관의 여주인들이고, 주점의 프리다가 된다. 이것은 대리, 대의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성]은 이렇게 매우 사회적/정치적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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