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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Feb 15. 2022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국가를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는 국가 지상주의적 정치사상

르네상스 시대의 외교관이자 작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서술한 군주의 정치 형태 묘사에서 유래하였다. 윤리적, 도덕적 규범에서 현실 정치의 해방을 지향하는 사상으로, 근대적인 국가관과 정치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편의주의 또는 일반 도덕률을 무시하는 행동, 교활한 기교로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행동방식을 의미한다(다음 백과사전)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위의 정의는 마키아벨리에게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나 역시 실제 [군주론]을 읽기 전에는 백과사전에 나오는 표현의 영향으로 마키아벨리를 막연히 ‘나쁜 놈’들의 조상 정도로 취급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 비평에서 늘 그렇듯 우리는 마키아벨리 당시의 사회/정치/국제 상황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교황과 각 지방의 토착 세력 그리고 외국 세력 간의 정치적인 수 싸움이 지리멸렬하게 펼쳐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현실주의적인 논조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군주론]이 출간된 1532년 이후 르네상스 운동 및 그 분위기와 적절히 버무려진(인본주의와 결합한 현실주의) [군주론]은 수많은 중요한 인물들에 의하여 수없이 인용되었고, 역사학자 및 철학자들의 분석대상이 되면서 어느 정도 좀 더 높은 지위로 올려진 측면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군주론]을 오늘날의 책들과 비교해볼 때, 당시의 군주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정도로 보는 것이 적당해 보인다. 어떤 고도의 철학적/역사적 통찰이나 인간의 심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논하기에는 너무나 짧고(내용이 충분하지 못하고) 그리고 처세에 관한 매우 방편적인 조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박한 나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서술 전략은 탁월하다. 현대의 작가들 조차 글을 쓸 때면(특히 책 출판을 고려한다면) 자기 검열로 인하여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고자 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논조와 관점을 찾고, (비난받을 수 있는) 극단적인 주장을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것은 어쩌면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알맹이를 포장하려는 의도로, 본질을 흐리는 신비한 안개를 만들어내는 것일지 모른다. 그 안개는 보통의 경우 도덕과 윤리 그리고 종교의 탈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마키아벨리는 그 안개를 눈앞에서 제거해 버렸다. 그것도 종교가 살포하는 경건한 윤리적 분위기의 중세 유럽에서 말이다. 당시의 많은 문장과 철학이 찬미와 종교적인 헌사로 미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날 것(현실적인 것)을 그 앞에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21세기인 지금도 마키아벨리의 방편적 접근이 유효하고, 수없이 많은 영역에서 재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 경영 등 모든 영역에서) 마치 선악과를 먹은 직후의 아담과 이브 같은 우리는 그런 논조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윤리와 도덕이 무시되었다며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말을 만들어 그에게 원죄를 씌워 비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인간에 대한 인식에서 볼 때, [군주론]의 현실주의(편의주의, 비 도덕성)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에게 인간의 본성은 나쁜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일반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즉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습니다. (제17장)


이 대표적인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외에도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군주론]의 곳곳에 등장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 세워진 그의 이론에 도덕과 윤리가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기만과 교활한 기교만이 남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이런 지극한 현실성 때문에 그는 가끔 르네상스와 섞인다. 만약 그가 인간의 착한 본성을 믿었다면, 그의 논의는 공맹의 철학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군주론]은 이렇게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신민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무질서를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씬 자비로운 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7장)


위의 ‘잔인함과 자비’에 대한 설명은 편의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대표적인 문구일 것이다. 제16장의 ‘관후함과 인색함’의 대비에서도 마키아벨리는 똑같이 개념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런 식의 개념의 대비는 헤겔의 ‘정반합’을 연상시키는데, 논리의 발전 단계에서 이런 편의주의적 방법은 상식에 기반하고 화려한 말발에 기원한 것으로 그 역사가 매우 깊다. 그리고 이런 편의주의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공리주의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런 절대 진리처럼 보이는 상식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집단의 가치가 부정될 때 위의 편의주의는 박살이 난다. 마키아벨리는 국가가 중요한 시절에 살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하기 위하여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에게 헌정된 유명한 두 유학자의 책이 있다. 이황의 [성학십도]와 이이의 [성학집요]가 그것이다. 이황은 그 나름의 도표를 3개 더 추가하긴 했지만, 두 책 모두 성리학에 기반하여 작가가 사서와 육경에서 발췌한 내용을 옮기고 그 나름의 해석을 가미한 책들이다. [성학십도]가 성리학의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해석이라면 [성학집요]는 왕이 알면 좋을 글들을 가려서 발췌했다는 측면에서, 제왕학이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목적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연의 일치로 세 권의 저서가 쓰인 시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비슷하다. 같은 시기에 조선과 피렌체 공화국에서 쓰인 제왕학의 논조는 매우 다르다. 이 책들을 받아 본 왕은 어땠을까? 조선의 책들이 매우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반면, [군주론]은 가까운 유럽의 역사에 근거를 두고,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선조에게 전달되었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고, 말로는 ‘상스럽다’고 하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우리와 유럽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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