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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May 03. 2022

부겐빌레아 마른 꽃잎처럼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의 논의에서 주인공 ‘금욕주의’는 현실과 만나는 지점에서 ‘항상 선을 행하지만 항상 악을 낳는 힘’이 되어 거부할 수 없는 세속의 강으로 타락한다.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보이는 이런 무기력하고, 씁쓸한 감정에 휩싸여 잠시 그는 ‘베버는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이다’라고 느꼈다. 그는 막스의 자본론이 교과서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살았다. 당시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미약하지만 그 반대편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논리와 근거로 읽혔다. 하지만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보이는 욕망에 패할 운명의 금욕주의와 세속화에 대한 그의 개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종교적 정당성과 후광을 입혔다는 베버의 정치적 혐의는 피할 수 없다.

베버는 중세 말 가톨릭의 권위에 맞서 들불처럼 번졌던 종교개혁 속에 자본주의의 씨앗이 있다고 본다. 그 씨앗은 개신교의 각 분파를 관통하는 예정론에 기반한 금욕주의로,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산속 수도원의 세속 버전이 된다. 수도원에만 국한되던 수도원의 지침과 수도사들의 삶의 방식은 종교개혁으로 속세에 내려와 모든 시민의 규범과 삶의 방식이 되었다. 개신교도의 의도는 중세의 느슨한 종교적 제약(교회의 영역에서만 머물고, 전통적이고 세속적인 기존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성전례와 고해 같은 주술을 인정하는)을 혁파하여, 인간의 삶 자체를 보다 종교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지향하였다. 현실에서 부의 축적과 생산성의 향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교리의 틀 속에서 개신교도는 자기의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가 되었고, 그에 따른 금욕주의는 자본의 축적과 투자를 자극함으로써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그들의 선배들이 팔던 면죄부, 마치 주술 같은 성전례, 터무니없는 죄 사함(고해성사)에 분노하면서, 좀 더 삶을 종교적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종교개혁을 몰아갔지만, 결국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잉태한다. 세상은 이런 식이다. 마치 미로 같은 골목을 이리저리 뒹굴고 굴러 다니던 부겐빌레아 마른 꽃잎처럼, 사람들은 특수한 목적으로 일을 추진하지만, 역사의 방향은 늘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종교는 자본주의에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하고, 그들의 선배(가톨릭) 보다 더 쪼그라들어 교회 속에 유폐되었다.

베버의 논의에서 금욕주의에 의한 자본의 축적은 자본주의 탄생의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다. 베버는 개신교의 교리에서 추론되어 나오는 ‘자기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자본주의의 본질로 생각하며, 긴 논문의 대부분 페이지를 할애한다. 베버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삶의 합리적인 조직화’를 경제분야와 직접 연결하여 자본주의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적자는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는 뒷부분 카를 피셔의 비판과 맥을 같이하는데, 종교개혁과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연결은 다소 억지가 있는 관념론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종교개혁이 추동한 ‘삶의 합리적인 조직화’는 계몽주의를 낳았고, 이것은 초기 공리주의의 바탕 위에 세워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상하는 것이 합리의 주인 ‘이성’이다. 합리주의와 자본주의는 같은 원류를 가지지만, 합리성이 초기 자본주의의 두뇌가 된다는 측면에서 구분된다. 이후 합리성과 자본주의는 환상의 복식조가 되고, 마침내 그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종교개혁, 금욕주의)를 잊는다. 어머니의 탯줄이 배꼽으로 흔적만 남 듯이, 이성과 자본주의의 광포한 질주 속에서 종교는 그 온기를 잊고 말라간다. 심지어 이성은 이제 神이 되어, 하느님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식이다. 인간의 행동은 부겐빌레아 마른 꽃잎처럼 방향 없이 흘러 다닐 뿐이다. 돌파구라고 생각했던 길이 막다른 길이고, 막다른 길에 들어서도 돌파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행동이다. 종교개혁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상에 이루고자 했지만, 그 의도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와 더불어 이성이 하느님을 대체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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