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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May 19. 2022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미국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는 책. 어떤 책의 권위를 성경과 비교하는 것은 엄청난 찬사를 포함하는 관용적인 비유다(1). [앵무새 죽이기]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인 ‘스카웃’의 일곱 살부터 아홉 살까지 약 3년의 시간을 스카웃의 관점과 목소리로 들려준다. 어린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이다 보니 문체는 간결하고, 담백하며 묘사는 진솔하다. 이 말괄량이 아가씨의 좌충우돌과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가끔 씩 웃게 되고, 포근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퍼 리는 ‘스카웃’ 이라는 매우 사랑스러운 인물 전형을 만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전형(젬 오빠, 핀치 변호사, 알렉산드라 고모, 모디 아줌마 등)은 우리가 흔히 미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해서 보아온 백인 인텔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남자아이들과 싸움을 하는 말괄량이이지만 호기심 많고 밝은 스카웃, 동생과 같이 놀고 불의에 분개할 줄 아는 젬, 바람직한 행동으로 자식들에게 늘 모범을 보이고,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따듯한 아빠 핀치 변호사. [앵무새 죽이기]는 사랑스럽고 건전하고 그리고 매우 바람직한 미국인과 미국 가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탁월한 인물 전형의 창조가 이 소설이 꾸준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는 힘이 된 듯하다.

소설 속 앵무새는 흑인과 부 래들리의 은유다. 앵무새는 죽이면 안 된다. 왜냐면 인간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의 편견은 흑인을 박해한다. 그리고 백인 앵무새(부 래들리)는 아니지만, 흑인 앵무새(톰 로빈슨)는 결국 죽는다. 이것이 [앵무새 죽이기]가 주는 주제의식의 한계다. [앵무새 죽이기]의 인종에 대한 관념은 ‘피해를 주지 않기에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인간에 대한 매우 도구적이고 소극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인종 문제는 미국에서 엄연한 본질적인 사회 문제이고, 이따금 당혹스럽게 튀어나오는 현안이다.

인종에 대한 역사적으로 축적된 불공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간다. [앵무새 죽이기]의 존재 자체도 이런 서서히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언제 명확한 결과를 만들 것인가? 흑인에 대한 차별은 표면적으로도 아직까지 미국 사회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만들어진 변화는 어느 순간 사회의 피로를 증가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차별주의자로 돌려세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보수의 약진이 그렇고,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그런 ‘역차별의 거북함’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20대 청년들의 ‘반페미니즘’도 이런 맥락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당위의 가치를 숭배하고 고민하도록 배웠다. 이 도덕과도 같은 당위는 개인의 이익에 맞서 무기력하다. 현재 한국 사회도 공동체의 당위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중요한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과거 같으면 경악할만한 말들이 뉴스를 통해 나오고,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때마다 그들은 공동체를 판다. 당위는 개인의, 특정 집단의 이익에 점점 질식당하고 있다. 과거 우리는 학점과 취업보다 대의(당위)를 위해 데모를 하고, 고민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격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런 당위를 외치던 자들은 이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뿐이다. [앵무새 죽이기]가 많이 읽힌 것은 그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당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인종주의적 관점을 공유하지 않으면 낙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동적이고, 간접적이고, 매우 미약하지만 [앵무새 죽이기]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미국인들의 필독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0년이 흐른 지금도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인종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여전히 1960년대 수준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인종문제는 다른 중요한 문제와 뒤섞이며 점점 골라내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것이 되어 우리 곁에 남아있다.

 이 당위와 이익의 문제는 소설의 끝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며, 인종문제에 있어 [앵무새 죽이기]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소설 속 핀치 변호사의 말처럼 ‘느리지만 꾸준한 노력을 수반한 작은 진전으로 변화되는 세상’과 미국 신문에 게재된 서평에서 언급했던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을 구하다가 우연히 잭을 죽여버리는 부 래들리 관련해서 당위에 대비되는 개인의 이익이 갑자기 튀어 오른다. 핀치 변호사는 고뇌하는 듯하지만, 스카웃의 입을 통해 살인을 덮어버린다. 나는 이 부분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미국 엘리트의 한계다. 흑인을 변호하며 갖은 사회적 구박을 감내했던 그 이지만 자신의 가족과 관련해서는 자신의 신념(부끄러운 아빠가 되지 말자)조차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카웃을 공범으로 만들었다. 법에 의한 공정함과 당위는 개인의 이익과 부딪혔을 때 폐기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인종적 관점이 매우 미약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1) 과연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을까? 내가 볼 때 사람들은 실제로 성경을 그리 많이 읽지 않을 것 같다. 시청률 조사 방법 중, 피플미터 방식이 있다. 적합한 표본 수의 가정에 있는 TV에 수신기 리더를 달아서 채널의 움직임과 지속 시간을 자동으로 조사기관에 리포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실시간으로 트래킹 하는 것으로 표본수가 충분하고 적합하다면 각 프로그램에 대한 정확한 시청률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랍 지역은 이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TV에 리더기를 달아 자신이 무슨 프로그램이 노출되는지를 꺼리기 때문이다. 아랍지역에서는 피플미터 대신 정기적인 설문지를 이용한 조사가 보편적인 시청률 조사 방법이다. 그래서 아랍지역의 시청률 조사를 보면 대부분 종교 채널과 종교 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의 상위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광고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감안하여 미디어 계획을 작성한다. 아랍인들은 종교적인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실재를 위장한다. 성경을 가장 많이 읽는다는 서구인들의 대답 역시, 이런 아랍 시청률 조사 방식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지난 1달 동안 무슨 책을 읽으셨어요? – (거의 책을 읽지 않음에 당황하며) 지난 일요일 교회에 가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성경구절을 같이 읽었어요. 이 정도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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