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T Jun 13. 2022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읽기를 마치고 뒷부분에 실린 작품 해설에 당황했다. 해설에서는 슈타인의 마지막을 자살이라고 이야기하고, 괴테의 베르테르(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자살과 비교하고 있다. 잘못 읽은 것인가 화들짝 놀라 슈타인의 마지막 일기와 니나의 언니인 마르그레트와의 만남 부분을 다시 읽었지만, 어디에도 자살로 추정할 만한 것은 없었다. 일기는 병이 들어 꺼져가는 슈타인을 그릴 뿐이고 마르그레트와의 만남에서는 장거리 여행을 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작품 해설은 번역자에 의해 작성되는데, 이 소설의 번역자는 도대체 무엇을 번역한 것인가? 혹시 그의 머릿속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스토리가 이 소설 안에서 중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작품 해설의 오류(?)가 아니더라도 이 소설의 끝 부분은 내게 모호함을 준다. 일기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슈타인인데,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니나를 쫓아 마르그레트만이 남아있는 니나의 텅 빈 집에 들어선다. 그는 마르그레트가 오해한 슈타인이 아닌 다른 남자인가? 만약 슈타인이라면 회복한 것인가? 아니면 슈타인의 일기에 푹 빠진 마르그레트에게 유령과 같은 환상을 보여준 것인가? 소설의 전반적인 사실적 서사로 볼 때, 작가가 어떤 환상을 마지막에 넣고자 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니나는 왜 떠나는가? 자신을 얽매고 싶어 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왔던 니나인데 주변이 힘들게 한다는 이유로 떠난다. 일관되게 일기 속에서 묘사되어 왔던 자유로운 니나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렇게 [삶의 한가운데]는 사실적인 서사와는 달리 모호함 속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전체의 플롯을 이끄는 ‘다른 사람이 일기를 읽는다’는 구성은 나에겐 다소 단순하고 안일해 보인다. 내용에 치중하기 위하여 형식적인 면을 포기한 듯한 인상마저 준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마르케스는 50년이 넘는 짝사랑을 묘사했다. 루이제 린저는 이 소설에서 18년 동안의 사랑을 묘사한다. 마르케스의 플로렌티노가 멀리서 지켜만 보다 마지막에 다가가는 사랑이라면 슈타인과 니나는 가까워졌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소유와 동일시된다. 니나 역시 슈타인에게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당신일 거예요’라고 말한 장면이나 퍼시와의 결혼은 ‘사랑은 소유’라는 통념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작가가 강조하고자 한 개념은 사랑(소유)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유’다. 이러한 이유로 [삶의 한가운데]는 페미니즘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페미니즘은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는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니나의 속하고 싶은 감정의 반동이 있고, 그녀의 주체적인 모습은 생활(삶)을 위한 피치 못한 부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의 제목인 ‘삶의 한가운데’는 매우 합당해 보인다. 나로서는 이 소설을 페미니즘만으로 읽기보다, 슈타인과 니나의 고뇌하는 삶, 관계에서 나오는 다양한 심리적인 묘사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컬러의 힘] 캐런 할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