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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un 15. 2022

[네임리스 신드롬] 차재민

SPECTRUM 2022 리움 미술관 전시 작품

 개인적으로 내게 네임리스, ‘익명’은 폭력이다. 것은 이문열의 단편소설 [익명의 섬]과 이 소설을 영화화한 1983년 작 정윤희 안성기 주연 [안개마을]의 영향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익명이 가하는 폭력은 낯선 개인에게 두려움이었고 그것은 집단적으로 은폐된다. 온라인 상의 댓글에 의한 폭력 역시 이런 익명이 가하는 폭력의 연장선 속에 있다.

 하지만 차재민 작가의 ‘네임리스’는 불확정성이고, 답답한 혼란을 의미한다. DNA까지 해독하는 최신 과학도 밤마다 어머니에게  찾아오는 통증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과학의 한계에 대한 좌절이고, 불확정에 대한 답답함이다. 이런 통증에 대한 관찰과 독서,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차재민 작가는 마치 김춘수의 [꽃]과 같은 존재론적 탐구를 진행한다. [네임리스 신드롬]은 그러한 존재론적 고민의 결과물이다.

 이 작품은 5개의 챕터를 가진 인문학 서적 같은 형태를 취하는데, 각 챕터는 서로 연결되기도, 약간 벋어나기도 한다. ‘추론의 세계’와 ‘삼총사’는 도입에 해당되는데,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주변, 부차적으로 보이는 것, 둘러싼 환경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은 병과 자기, 통점의 문제로 넘어오면서 원인과 결과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분명한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고, 현대 의학은 여전히 허술한 환자의 말과 의례적인 장비에만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름 모를 병은 사회와 과학의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결정될 뿐이다. 여전히 많은 수의 질병이 그냥 ‘화병’으로 불릴 뿐이다.

 24분짜 영상 작품인 [네임리스 신드롬]은 책이다. 실제로 여러 가지 책들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구성하여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같은 전시관 안쪽에 전시된 안유리 작가의 [스틱스 심포니] 역시 영상 작품이지만 교향곡의 4악장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음악이 되었다. 이렇게 작가들에 의하여 문학(심지어 인문학)과 음악은 미술과 만난다. 사실 예술의 카테고리 구분은 역사의 관성일 뿐 수용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교차를 통해 더욱 풍요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젊은 작가분들에게 개인적인 박수를 보낸다.

 몇 번 더 미술관에 간다면 알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네임리스 신드롬]의 내레이션과 영상과의 관계가 다소 혼란스럽다. 특히 ‘지문’ 챕터에 나오는 드론 영상은 너무 뜬금없어 보인다. 보이는 영상과 내레이션이 조금 더 교묘하게 붙는다면 너무 뻔해서일까? 이 뜬금없음은 확정할 수 없는 ‘네임리스 신드롬’을 드러내는 숨겨진 장치일지 모른다는 관대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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