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T Jun 22. 2022

생각이 말라간다

롤란드 베인턴 [종교개혁사] 읽는 중에

생각이 말라간다. 외부의 자극은 생각을 자라게 하지만,  그 생각은 단편성을 벋어 나지 못한다. 곱슬머리가 배배 꼬여 두피의 안쪽을 파고들 듯, 생각은 밖으로 자라지 못하고 내 안으로 파고든다. 내가 의도한 수많은 자극은 머리에 죽창처럼 꽂혀있을 뿐이다.

아래의 글은 [종교 개혁사]라는 책의 자극이 나의 생각을 어떻게 안으로 파고드는지에 대한 사례가 될 것이다. 민족주의의 발흥을 의도적으로 종교개혁 즈음으로 호도하면서, 학자들의 일반적인 설을 곡해한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것보다는 엉뚱하게도 민족주의에 강한 관심을 두고, 그것을 갈라 치기로 봄으로써, 개념의 문제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의 전가의 보도인 ‘보르헤스’를 인용하며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슬쩍 담을 넘는다. 이제 나의 독서는 takeoff 하여 발은 공중을 젖고 더 이상 현실을 딛지 못하고 아주 작은 환상으로 빠져든다.


고대에도 민족 개념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구분은 약했다. (이스라엘은 예외) 그러나 중세는 여러 민족이 같은 종교 아래에 묶이면서 중세인들에게 민족 개념은 다소 희박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세 말 많은 르네상스인들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에서, 독일에서 환대받고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의 종교라는 체계가 깨지고, 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 강조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종교 자체는 보편을 지향하지만, 국가와 지배층이 그 이익 기반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민족은 아주 좋은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서 가톨릭의 외국 군대 사용은 민족주의 관점에서 비난받았고, 네덜란드에서의 신교 공인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병행되었다. 이러한 각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종교개혁 이후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는 절대왕정에서 더욱 확고하게 변했다.

현재 우리가 앓고 있는 중국 혐오와 역사에 기반한 일본 혐오 역시 민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민족주의는 어떻게 보면 오늘날 정치세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갈라 치기’의 원조 격인지 모른다. 아직도 민족은 절대 가치로 인식되지만,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은 특정 기간 동안 이용당하다 없어질 운명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다.

민족의 개념이 희박하던 시기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을 다른 민족과 갈라 치고, 자신의 민족에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영광을 입힘으로써 세계사 속에서 좌충우돌했다. 이스라엘은 민족주의의 아주 오래된 시작인 듯 보인다. 니체는 당시의 환경 속에서 전체 유럽을 대상으로 논지를 펼치고, 국가의 통합을 이야기했고, 트로츠키는 전 세계의 통합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이렇게 민족주의가 인류가 극복해야 할 이데올로기라면,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의 교훈을 역사에서 배워서 알고 있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면 이 지구에서 민족주의는 힘을 잃을 것이고, 그러면 지구인이라는 또 다른 갈라 치기 개념이 등장할 것이다. 이 갈라 치기는 개념화가 가지고 있는 속성에 기반한다. 개념은 특정 실체를 포함하고 동시에 특정 실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에 의한 일반화는 보르헤스의 튈른 행성 모델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명사의 부재와 인과율의 거부는 세상에 엄청난 다양성을 부여한다. 개념의 명확성 – 사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추동했던 합리주의의 전제다 – 은 논리의 성장과 이성의 힘을 키웠다. 인류는 태어난 이래로 개념의 명확성을 기반으로 이성의 성을 쌓았다. 인간은 개념에 의해 마음을 다치고, 상처를 입으며 몇 천년을 살았다. 이제 이 갈라 치기는 멈추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네임리스 신드롬] 차재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