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T Aug 07. 2023

[신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에게 神은 大慈大悲함으로 가득한 존재. 한없이 자애롭고, 무엇이든 포용하는 커다란 존재지만, [신곡]에서 신은 복수심에 불타는 근육질의 퇴역 미군이고, 단호한 재판관으로 고담 시의 정의를 수호하는 베트맨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의 피조물인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눈치를 봐야 하고, 우러러 숭배해야 하며, 행동으로 그의 은총에 보답해야 한다. 신의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은 서양문학과 예술 속에 면면히 스며 있어서, 서양의 예술을 쫓아가는 나로서는 어떤 경우 매우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서양 전통에서 신이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띄게 된 것은 신이 생명의 축복으로 인간 각자에게 부여한 ‘자유의지’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말 그대로 자유롭게 아무 방향으로나 뻗을 수 없고, 창조주에 대한 지향을 가지는 힘으로,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절대적인 숭배를 요구하는 행동의 근간이었다. 다소 욕심쟁이 같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명확한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창조주의 대리인들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생긴다. 자유의지는 ‘善의지’로 해석되고, 대리인들에 의하여 창조/해석된 도덕이 ‘보편 도덕법칙’으로 마치 신의 말씀처럼 행사하기 시작한다. ‘자유의지’의 방향이 모두 창조주에게로 향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해석된 도덕의 지평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되었다. 도덕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간의 정치투쟁의 부산물이라는 니체의 계보학적 통찰은 대리인들의 정치행위에 대한 고찰에서 그 탁월함을 갖는다. 이렇게 하늘의 의지와는 다른 ‘근본을 알 수 없는 현실 도덕’은 ‘자유의지’에 책임을 묻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단테는 수많은 자신의 적들을 지옥 불에 태우고, 연옥에서의 참회의 고통을 부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신은 정의의 수호자가 된다. 오! 비스밀라히 라흐 메니 라힘.


[신곡]과 자살

[신곡]에서 단테는 자살을 매우 엄중한 죄의 하나로 제7 지옥에 위치시킨다. 이는 살인과 폭력의 카테고리로 타인 폭행과 살해, 신에 대한 폭력(비방)과 같은 무게로 취급된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행한 자살이 왜 이렇게 엄중하게 취급되는 것일까? 이런 자살에 대한 금기는 불교에서도 비슷하다. 불교에서 자살은 불살생의 계율 위반으로 취급된다. 자살에 대한 금지의 이유는 가톨릭과 불교에서 정확하게 일치한다. 자신의 목숨을 끊는 중요한 사건인데, 겨우 계율 위반이라서 안된다? 조금은 빈약해 보이는 자살 금지의 이유다.

사실 신의 축복인 ‘자유의지’가 온전하다면 ‘자살’은 키릴로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제 될 것이 없다.(도스토옙스키 [악령] 중) ‘자유의지’가 현실의 도덕으로 제단 되지 않는다면 자유의지는 무한의 방향성을 가질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 어떤 비난도 할 수 없다. 다른 행위들과 더불어 자살도 현실 도덕과 결부되면서 종교적인 금기가 되었다. 이 금기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표현으로 점점 이데올로기화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신곡]과 호피무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