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페스트]를 읽어 볼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이 부조리를 드러낸 것이라면, [페스트]는 부조리의 극복을 제시한다’고, 각종 평론에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시지프 신화]는 [이방인]과 [페스트]를 쓰게 된 작가의 소설 창작 동기 같은 부분이 있다.
[페스트]에서 제시한 부조리 극복의 대안은 매우 개인적이다. 까뮈는 매우 휴머니즘 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노력하는 개인, 마치 슈바이처나 나이팅게일 등, 성자 같은 개인을 상정하고, 그들에 의한 극복의 모범과 희생을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사회)과의 연대를 극복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까뮈의 이런 휴머니즘적인 대안의 제시는 까뮈를 프랑스 철학과 문학에서 왕따로 만들었다. 구조주의가 서서히 떠오르던 시대에 휴머니즘은 敵들이나 구사하던 신파요, 오래된 전략인 것이다. 까뮈는 다소 뻔한, 도덕교과서 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부조리를 끊어버리는 방법으로 각성된 개인이 없다면 극복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페스트의 갑작스러운 전개, 변화를 보면서 든 생각 – 변화에 빠질 때와 변화에서 빠져나올 때 개인의 적응은 어떨까? 빠질 때는 기존 질서의 익숙함 때문에 저항하다 이것이 변화인지, 변화가 아닌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젖을 만큼 깊거나 길지 않다면 빠져나오는 순간은 인지 가능하다. 친일파의 탄생이 이와 비슷하다. 기존 구한말의 상황에 표류하던 사람들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변화에 상대적으로 쉽게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의 시점에서 그들은 또 다른 변화를 묵도하지 못하고 저항했지만, 이상하게도 정치 상황은 친일파들의 저항을 긍정으로 풀어 버렸다. 외부요인(미국) 때문이다.
까뮈의 인종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비록 알자스 출신 아버지와 스페인 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까뮈는 분명 아랍인들과 같이 생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과 [페스트]에는 아랍인이 없다. 단지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총에 맞는 아랍인과 3명의 친구가 잠깐 나올 뿐이다. 까뮈는 알제리 독립운동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모르지만 까뮈는 철저한 프랑스인이고 싶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