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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by YT

고전을 읽자는 다짐이,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발표된 [데미안]을 주문하게 만들었다. 정말 유명한 책이라, ‘어떻게 이것을 안 읽을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 읽어보니, 어렸을 때는 아마 너무 재미없었거나, 어려워서 책을 들었다가 금방 포기해 버리지 않았을까 변명해본다. 대학생 때, [데미안]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한참 포스트 모던의 광풍이 불고, 철학에 경도되었던 시대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 후의 나의 삶이 달라졌을까? 나의 삶이 좀 더 찼을까? 암튼 나는 나이 50에 [데미안]을 처음 읽었다.

처음 1,2 챕터 까지는 어린아이의 성장 소설인가 했지만, [완득이] 같은 소설은 아니다. [데미안]은 소설적인 구성 면에서 아주 재미없는, 발단-도입-전개-절정-정리 같은 흐름도 없는 그런 책이다. 사실 소설이라기보다는 철학 에세이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저자의 생각은 매우 신비적이고, 구도자의 길을 살고 싶어 한다. 가끔은 매우 플라톤적이고, 전반적으로 그노시스적이며, 나에겐 익숙하지만 서양인에겐 낯선 불교적인 색채를 다수 드러낸다. 헤르만 헤세가 나중에 [싯탈타]라는 소설을 쓰게 되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데미안]의 후반부를 읽으며, 성장 소설이라는 어쭙잖은 생각에서 탈피하여 구도 소설임을 인지하고 나서,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떠올렸다. 종교의 영역 내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는 면에서 매우 유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개인적으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이야기 꾼인 이문열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소설적으로 훨씬 완성도가 높고, 재미있다. 하지만 1979년에 발표된 [사람의 아들]은 저자의 이데올로기적인 경향과 1980년대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매우 평가절하 되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인류의 고전이 되었다. - 또, 우리 내 거의 대부분의 사찰에 벽화로 그려진 [십우도]와도 그 뜻이 통함을 느꼈다. 어쩌면 [십우도]가 저자의 주제의식과 더 맞아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의 고난과 어려움 번민 등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사실 나도 에밀 싱클레어처럼 살고 싶었다. 싱클레어에게는 자기 자신이 최종 목적이었지만 나에겐 ‘세상의 원리’를 찾고 싶은 욕망이 있다. 공자의 仁처럼, 마르크스의 소외처럼, 부처의 緣起처럼…, 그래서 내가 이 소설을 조금 더 일찍 읽었다면, 그 해답을 찾는데 더 도움이 되었을까? 나의 구도의 방향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답을 찾아야 한다. 그 답을 찾는 것이 사람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작은 것 하나만 짚고 가자. 출판사 ‘자화상’. 사실 나는 출판사의 Name Value를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번역책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자화상’에서 나온 데미안은 오자 투성이다. 특히 조사가 틀린 것이 많아서 내 나름대로 해석하며 읽어야 했었다. [데미안] 같은 100년이 된 고전은, 아마 한국어 번역본도 적어도 50년은 되었을 것 같다. ‘자화상’의 [데미안]을 선택하면서(좀 저렴했다.) 오래된 고전인데 번역이야 메이저 출판사들과 차이가 없겠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하나 알았다. 고전의 경우에도 출판사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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