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나메]의 마지막에는 ‘아시아 클래식’을 펴내며 라는 출판사의 글이 있다. 그 글 중 한 부분을 인용한다.
몽골의 한 소년이 초원을 초토화시킨 참혹한 조드(재앙)의 희생자가 된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염라대왕이 돌려보내며 한 가지 선물을 준다. 소년은 뜻밖에도 ‘이야기’를 선택한다. 세상에 이야기가 생겨난 사연이다.
이마저도 이야기인 이야기의 탄생은 인류가 이야기를 벋어나 살 수 없음을 말한다. 개인의 생각파편은 시시때때로 서로 뭉쳐 자기 합리화를 위한 이야기를 만든다. 대상과 사건에 감정을 투입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견딜만한 것으로 변형한다. 그래야 사람은 살 수 있다. 개인차원의 이야기는 집단으로 확대되어 설화, 신화가 된다.
문제는 이야기 발생 과정에는 욕망이 스민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특정 경향성을 지닌다. [샤나메]는 당대 아랍의 질주에 맞서 페르시아적인 것을 세우기 위한 의도로 작업되었다. 페르도시의 의도와 욕망은 아랍/중동과 다른 페르시아성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이란에서도 올곧이 살아있다. 제아무리 담백한 서술이라도 이야기에는 의지와 욕망이 스며든다.
왜 이야기는 경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앞의 몽골 이야기 탄생 설화에서 찾아보자. 이야기는 염라대왕의 선물이다. 즉 염라대왕의 의도와 욕망이 이야기에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이승의 저승화를 목표로 하고 있을지 모른다. ‘성장’은 옥황상제가 만들어 낸 세상 운영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들고 간 이야기는 이승에 뿌리는 염라대왕의 전략이며 욕망이다.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도피와 정신 마취의 단기적 순기능도 있지만. 이야기는 창조되고 변형되고 왜곡되며, 사람들 간에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성을 쌓는다. 이렇게 염라대왕은 소년에게 이야기를 들여보내며 속으로 미소 지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