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구하기 힘들다는 크림대빵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시장 파전보다 큰 크림빵을 보며 헛웃음이 났다. 또, 얼마 전에는 점보도시락이 먹방 유튜버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신제품 개발에 대한 압박이 개발자들에게 이런 재미있는 특이점을 만들었다. 르네상스 3대 천재 화가의 권위에 눌린 매너리즘 화가들 역시 크림빵의 개발자들과 비슷한 고뇌를 했을 것이다. 다빈치만큼 정밀하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만큼 정확하게 인체를 표현할 수 없었고, 라파엘로만큼 화려하거나 사랑스럽게 표현하지 못했던 그들은 좌절 속에서 고뇌했을 것이다. 그런 집적된 좌절과 고뇌는 목이 이상하게 늘어난 성모와 볼록렌즈에 비친 기다란 손을 만들고(파르미자니노),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분주한 범부의 일상을 표현하고(틴토레토), 길쭉하고/각진 인물들의 염원(엘 그레코)을 그리게 된 것이다.
경제학과 사회학에서는 ‘계단식 성장 모델’이 있다. 주로 현재상황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성장을 위해서는 ‘일정기간 동안 집적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미 특정 방향의 성장과 진보의 개념이 제거된 나의 인식과 사고는 ‘집적’에 주목한다. 집적의 과정은 고통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길게 늘어진다. 매너리즘 이후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등의 미술사조는 분명한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상파의 등장을 위한 기나긴 매너리즘의 접적과정이고, 한 송이 국화를 위한 소쩍새의 쉬어버린 울음이다. 종이 위에 그려진 짧은 계단의 평행선은 고통의 지난한 과정이다.
과거의 규범이 法이 된 현실에서 새로운 것(Something New)에 대한 욕망은 무료한 계단에 삶의 파동을 만든다. 그 파동이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이고, 우스꽝스러운 크림대빵이다. 권태로운 계단의 평행선에서 개별적인 파동은 집적되고, 욕망을 끌고 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파르미자니노의 실험은 변형이 만드는 이미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틴토레토의 어수선한 최후의 만찬은 풍속화의 생산을 자극했고, 엘 그레코의 염원은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크림대빵은 대량생산체계에 영향을 줄 것이고, 점보도시락은 음식문화를 더 즐거운 것으로 바꾸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집적의 갯벌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