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간다. (25장)
이 멋진 선언에도 불구하고 익어가던 이야기는 슬며시 옆구리가 터지며 즙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달콤한 분노는 쓸모없는 땅에 떨어져 말라갔다. 29장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던 현실적 분노는 발아하지 못하고 퇴화되어 다시 배유(어머니와 로저샨의 모성) 속에 갇혀버렸다. 톰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남성성은 장대한 끈기의 모성으로 갑자기 전환되었다. 부풀어 터질 것 같던 희망은 다시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에 갇혀버렸다.
희망은 실천력을 가지지만, 이와 동시에 반대로의 후퇴도 자극한다. 캘리포니아 대지주들이 뿌린 전단은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의 힘든 여정을 상쇄하는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도착 이후 벌어지는 더욱더 고단한 생활 속에서 이제 더 이상 희망의 추진력을 기대하긴 어려워진다. 이때 희망은 모성으로 회귀하고, 희망은 다시 씨앗으로 저장된다. 이 과정에서 희망은 자기기만을 먹고 산다. 소설 속 조드 가족도, 존 스타인벡 역시도 분노와 희망을 뭉쳐 씨앗으로 다시 시간 속에 저장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