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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Mar 25. 2024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2.

공포다. 그동안 잘 피해왔는데…, 선입견을 갖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책소개도 읽지 않고, 유명세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주문했는데, 읽는 내내 심연의 공포와 마주해야 했다. 내키지 않은 독서의 속도는 느렸다. [멜랑콜리아] 이후 한 달 반이나 지나서야 겨우 한번 완독 했다. 고공에 멈춰 선 자이로드롭의 낙하 같은, 자신이 딛고 있는 바탕이 제거되는 공포. 산업의 구조가 변화하던 1930년대 미국의 조드 가족은 땅을 잃고, 희망이라는 전단만 들고서 도로로 내몰렸다. 글로벌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지금, 개인의 바탕은 더욱 쉽게 허물어진다. 이젠 희망도 없다. 오로지 ‘하쿠나마타타’식 주문과 위로만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누굴 쏴야 하는가? 고통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 젊은 시절 다혈질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이 트랙터에 부서지는 상황에서 누굴 쏴야 할지 몰랐다. 트랙터 운전수에겐 이유가 있었고, 그를 고용한 은행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보안관보들의 폭력도 스스로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캘리포니아 대지주들의 적개심은 선조들의 피로 빼앗은 이 땅을 다시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에 기인한다. ‘어쩌면 우린 유령과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엔 이유가 있고, 그걸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는 구조의 피해자들이다.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은 도구가 되고 대상이 된다. 농부에게 땅은 강아지처럼 생명과 감정으로 연결되지만, 트랙터 운전수에게 땅은 짜증 나게 넓은 일터일 뿐이다. 기업과 은행은 오키(오클라호마로부터 온 이주자 무리들)들에게 빵을 자선할 수도 있었을 돈으로, 무기를 사고 보안관보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내몰았다.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모두는 감정이 제거된 대상이 된다.

이런 구조 아래서 ‘개인의 영혼은 거대한 영혼의 일부분이다’라는 ‘우리’ 개념은 구조의 억압을 극복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 ‘우리’의 실천적 모습은 구성원의 자율로 운영되는 ‘워드패치 캠프’를 보여준다. 하지만 생산수단을 스스로 가지지 못하는 그곳은 구조를 대체하기엔 미약했다. 단지 ‘우리’의 이념만이 케이시를 통해 톰 조드로 상속될 뿐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에 맞선 개인은 우리로 각성하거나 혹은, 분노를 삭이며 희망의 씨앗을 미래로 저장할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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