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록 실망은 더 부풀어 올랐다. 400페이지를 넘으며 권태로운 가스는 생각에 가득했고,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을 정도로 문장은 파편이 되어 그의 책상에 흩어졌다. 서사는 반질반질한 도로로 미끄러졌고, 인물 묘사는 뻔한 3류 서사의 예상을 벋어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가지게 되는 격정과는 반대로 그의 처음 열정은 옆구리가 터져 바람이 샜다. [오향거리]의 꿈틀대는 힘과 그 에너지가 몰아가는 집단적 광기의 서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보고 싶어 했던 것을 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격정세계]를 다음 읽기로 정한 것은 찬쉐의 최근작은 [오향거리]에 비해 어떻게 변화하고, 또 얼마만큼 발전했을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독서의 중간에 뜻하지 않게 그는 익숙함/식상함의 권태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며칠 동안 [격정세계]는 400페이지쯤에 책갈피가 키워진 채 그의 책상 한편에 버려졌다. 모바일 게임을 하며, ‘꼭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잖아’라고 위안하며 며칠을 버텼다. 하지만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자.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200페이지 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시간을 써서 읽은 400페이지가 아깝지 않은가? 작가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깨진 의미를 주워 다시 꿰어보자. 작가의 의중으로 들어가 보자. 그래 이제는 ‘왜 작가는 이 소설을 썼을까?’에 초점을 맞춰 읽어 내자. 그렇게 그는 다시 소설을 들었다.
모든 소설가가 자신의 직접 체험을 중시했던 조지 오웰일 수는 없다. 소설은 작가의 제한적인 경험 위에 스스로의 공부와 상상이 얹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번 아웃’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어떤 순간 소재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럴 때면 작가는 자신의 좁은 경험으로 돌아온다. [격정세계]는 찬쉐의 이런 퇴행의 발로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서 찬쉐는 대중성을 잃었다. [격정세계]는 문학을 소재로 선택함으로써 확장성 포기한 대신, 문학을 위한 깊은 고민으로 들어갔다. 이게 바로 소재적 측면에서 찬쉐는 왜 그랬을까? 에 대한 해답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그녀의 서술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분명 [오향거리]에서 보아온 에너지의 꿈틀거림과 휘몰아치는 힘의 파워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문학을 신의 경지에 올렸다. 그리고 신의 존재 자체가 삶을 결정하 듯, 문학이 주도하는 삶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격정세계]는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비유될 수 있다. 환한 빛의 은혜와 은총이 등장인물의 삶 속에 스며들고, 의지를 강화하여 결계를 풀고, 결국 문학과 몸이 합일하는 과정. 이것은 매우 종교적 경험과 유사한 성스러운 체험이다. 마지막 부분 마치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를 연상시키는 차오쯔와 이하이의 은산 여행은 문학의 길, 신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 여행이다. 단테가 베아트리스의 안내로 천국으로 인도되 듯 차오쯔는 이하이의 인도로 문학의 산으로 향한다. 그는 마지막 차오쯔와 이하이의 여행을 통해 [오향거리]의 마지막과 같은 ‘삶의 긍정’이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긍정의 길은 같은 길이 아니고 각자의 다른 길이다라는 메시지를 그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소설이 그리는 모습을 도안으로 그려보면 문학이 주는 은총에 각각의 커플은 감사하고, 감동하며 그 감동은 은산의 등산을 통해 마침내 그 기원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찬쉐는 이런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소설을 덮고 작가가 왜 그랬을까에 대한 의문을 풀고, 또 작가가 그리는 전체적인 도안을 그려보며 작가에 공감하고, 긍정할 수 있었다. 끝까지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작가의 방식은 일반적인 잘된 소설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 소설의 서사는 너무 뻔하고 바람직(?)하고, 투명하다. 그런데 뭐 소설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격정 세계] 읽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