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
갑자기 주변의 소음이 내려앉고, 지상을 덥히던 더운 열기조차 단전 아래로 숨었다. 순수인식주관이 사물에 숨어들었다. 여기저기 의지의 덩어리가 벌거벗은 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순수인식주관이 나타나기 전, 그는 답답했다. 세상은 홍수에 휩쓸리 듯 그를 타고 넘었고, 그의 개별적인 작은 의지는 아무런 저항도 작은 생채기도 만들 수 없었다. 어느덧 의지의 버무림 같은 홍수의 쇄도는 개별적인 것을 치고 포섭하며 넘어간다. 이것이 지지고 볶는 삶이고, 이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다. 하지만 순수인식주관의 빛에서 의지의 홍수는 그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어 민망하게 서 있다. 그는 더럽고 추악한, 덕지덕지 붙은 돌기의 흔적을 품고 있는 덩어리 유기체인 의지를 보았다.
1990년대 언제쯤 사교육이 발화했다. 재수생들의 단순한 재교육을 담당하던 사교육 시장이 재학생으로 퍼졌다. 당시 발화자의 의지는 미약했지만 환경적인 요구와 세대적인 이슈가 섞이면서 눈 굴리듯 갑자기 커졌다. 이런 과정에서 각각의 의지는 뭉쳐져 커다란 의욕과 욕망의 버무림이 되었다. 그리고 공교육과 대항하며 세력을 더욱 키웠다. 사교육의 의지는 공교육의 매너리즘을 과감히 부숴버렸고, 이젠 아무리 제도를 손보려 해도 어쩌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렇게 사교육은 우리 사회의 볼에 붙어 딱딱한 혹덩이로 변해간다. 누구도 그 혹을 제거할 수 없다. 우리는 그 혹과 같이 살아야 한다. 욕망으로 묘사되는 자본주의는 의지의 괴물이고, 경제학은 욕망/의지를 산술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그가 시선을 거둔다. 순수인식주관의 빛을 걷었다. 이제 의지의 나신은 가려졌고, 굽이치는 의지의 홍수를 다시 마주한다. 하지만 그 순수인식주관 상태의 기억은 남아서 한동안 그를 괴롭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