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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역사] 성동기

by YT

한지의 여기저기에 짙은 색의 점을 찍는다. 그리고 점은 번지며 서로 겹치고 파동과 중첩을 만든다. 그리고 점은 계속 추가된다. 추상행위예술을 연상시키는 이런 행동은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이해하는 간단한 이미지일 수 있다. 아래쪽에서부터 치받는 페르시아의 점이 있고, 오른쪽에서는 중국의 모래바람이 텐산산맥을 넘어 불어오고, 왼쪽으로는 아랍/이슬람의 향에 취한다. 그리고 다시 중앙아시아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몽골의 말발굽이 새겨진다. 그리고 위쪽에서 쭉 그은 짙은 먹은 스텝을 넘어 아래로 번진다. 그리고 최근에는 러시아의 우산이 우즈베키스탄의 하늘을 덮었다. (이 외에도 페르시아의 끝물에는 알렉산더의 영향이 있었고, 쿠샨의 시대에는 이슬람 이전에 불교가 있었으며, 근대에는 우즈베키스탄의 남쪽 아프가니스탄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영국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정체성’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학문의 오래된 본질 중심의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 최초의 점을 찍은 것일까? 짙은 농도의 점을 인식하는 것은 인류의 기록문화에 근거하는데, 우리는 기록 이전에 말이 있었고, 기록 이전에 실체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정체성을 본질로 세우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자기 고백과 같은 것이다. 2000년을 들어서며,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크語를 공식화하고, 소비에트에 편입되었던 시기를 식민지 시대로 규정하며 활발하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우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알리셰이 나보이의 위상이 커지고, 호레즘 왕국의 잘랄웃딘이 우즈베크의 동전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몇 세대가 흐르면 우즈베키스탄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정체성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작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 그렸던 한지와 번짐의 이미지에서 겹침(중복)이 많은 지역이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중첩이 많음은 그 지역이 혼란스러웠다는 것이고, 혼란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 역시 매우 고단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다툼을 야기한다.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우리는 좋은 것인가? 정체성은 가치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정체성이 가치의 영역일 때, 포용과 화해는 없고, 극한 대립으로 치달을 뿐이다. 세상은 모두 변화의 한 점을 가질 뿐이고 그것의 지향점도 모호하다. IDENTITY는 (의도를 위한) 편의적인 개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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