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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존 밀턴 1.

‘시형에 관하여’

by YT

밀턴은 [실낙원]을 발표하면서 전통적인 운율을 따르지 않은 자신의 시형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글의 내용을 제한하거나 방향을 틀어버릴 수도 있는 각운을 무시하고, 적당한 수의 음절과 시절의 바뀜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의미와 감정의) 차이를 통해 충분히 시의 음악적 기쁨을 확보할 수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더 밀어본다면 언어는 본질적으로 음악적 특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각운처럼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언어는 말로 표현되거나/글로 쓰였을 때, 그 속에는 어떤 리듬을 담고 있다. 밀턴의 말대로 그것은 음절의 수에 의해 생기거나, 의미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더욱이 그 언어가 감정을 담고 있다면 감정의 진폭은 언어의 음악성을 배가시킨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의 감정과 나의 감정이 같은 리듬을 타는 합창과 비슷한 것이 된다. 이런 음악성은 문어체 보다 구어체일 때 더 강하고, 학술적인 글보다는 감정을 실은 신변잡기를 다룰 때 더욱 두드러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언어, 자체는 음악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럼 번역문의 경우 음악성은 어떻게 담보될까? 마찬가지다. 어떤 언어든 음절의 수와 의미/감정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 자체가 다르므로 리듬의 파동은 결코 원작과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밀턴이 인식했던 [실낙원]의 리듬과 한글판을 읽고 있는 나의 리듬은 분명 다르다. 조신권 번역가는 [실낙원]의 시적 리듬을 고려하여 몇 가지 번역의 기술을 사용하는데, 이는 [실낙원] 한글판의 시적 리듬의 파동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첫 번째는 고어의 형태(예: 청하노니, 도우시라, 것이니, 성령이시여 등과 같이)를 문장 말미에 삽입함으로써 감정의 증폭을 더욱 키운다는 것이다. 감정의 증폭은 낙차를 만들고, 낙차는 음악적인 리듬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어 형태의 차용은 마치 옛날 성경책을 읽을 때와 같은 격정과 도취를 만들어 낸다. 두 번째는 영어문장을 그 순서대로 그대로 번역함으로써 새로운 리듬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도치(倒置)에 의한 음악성의 강화에 해당한다.


말하라, 뮤즈여, 그때 알려진 그들의 이름을,

처음 온 자와 뒤에 온 자 모두가 그 불의 침상에서 자다가

대제의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하나하나씩 순위에 따라,

잡다한 군상들이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대제가 서 있는 텅 빈 바닷가로 나온 그들의 이름을. (1편 29페이지)


아마 영어의 that이나 who절로 연결되었을 첫 행과 나머지 행들을 영문의 순서대로 번역함으로써, (어쩌면 안일한 번역일 수도 있을) 의도치 않은 도치를 만들었고, 이 도치는 뜻밖에도 [실낙원]의 시적인 리듬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원작의 리듬을 고려한 탁월한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어의 사용과 문장의 도치는 밀턴이 의도한 음악성을 자연스럽게 번역본에서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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