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사탄에 끌리는가?
[파우스트] 속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끌리고, ‘연옥’과 ‘천국’보다는 [신곡]의 ‘지옥’ 편이 더 재미있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실낙원] 속 사탄의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이들의 캐릭터가 좀 더 입체적이기 때문이고, 고통과 슬픔이 행복과 기쁨의 감정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전능자와 성자,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은 책을 읽듯 발 연기를 펼치는 것처럼, 마치 종이 인형이 나풀거리는 것과 같이 평평하다. 시인으로서, 운율의 창조자로서 밀턴은 그들에게도 감정의 기복을 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존재의 완벽함은 밀턴을 억눌렀다. 그들은 완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사탄은 입체적이다. 최고의 행복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좌절이 있고, 성자에 대한 질투와 성부에 대한 배신의 감정이 끓어오르고, 이 속에서 자신에 대한 비애가 있으며, 격정적이고 체계적인 복수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말하는 이런 감정의 요동 때문에 그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고, 밀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탄은 후대의 시인들에 의하여 변주되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된 것이다.
사탄과 더불어 [실낙원]은 ‘아담’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10편은 아담의 원망과 고통, 체념과 반항,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희망과 감사로 다시 돌아오는 극적인 모습을 그의 독백과 하와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하늘의 벌인 죽음이 지연되고, 지연되는 죽음은(삶은) 고통임을 간파한 아담은 즉각적인 죽음을 갈구하지만, 하와의 도움으로 사탄에 대한 복수 의지와 하늘의 관대함에 대한 확신으로 회귀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10편까지 읽었다.) 밀턴은 아담에게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투영한다. 그동안 이야기(신화) 속에서 신과 사탄에 비해 존재감이 없었던, 그들 사이의 부수적인 대상물에 불과하던 아담, 즉 인간의 고뇌를 밀턴은 ‘매우 인간적인 감정’으로 입체화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