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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존 밀턴 4.

어느 불신자의 독서

by YT

애쓴다. 밀턴은 성자의 모습과 위상을 묘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성자의 위상은 하나님과 동등하고 하늘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데 [실낙원]에서 그는 마치 제우스를 보좌하는 헤르메스 정도의 위상을 지닌다. 하늘 위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하고 거기엔 분명 위계가 있는 듯 보인다. 이는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묘사를 모두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를 신으로 밀어 올린 초기 기독교 정경화 작업의 모순이다. 이런 오랜 전통 아래에서 성자의 위상은 애매하다. 전능자의 명령을 수행하여 직접 사탄의 군대에 대항하고, 전능자의 분노에 은총을 애원하는 그의 모습은 분명 군주를 대하는 신하의 모습에 불과하다. 진정한 동물의 세계를 그리기보다 인간적인 동물의 세계를 그리는 동물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처럼, 밀턴은 하늘의 세계를 마치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아버지가 존재하는 가부장적인 영국 가정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고, 성자는 이곳의 믿음직한 외아들일 뿐이다. (이에 반해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의 일들을 공간을 분리하여 성모의 공간, 별채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상정함으로써 매우 스마트하게 이를 극복했다)

10편에서 그쳤다면 더 좋았을 걸. [실낙원]은 원래 10편으로 먼저 출간되었으나 그 후 2편이 추가되어 총 12편으로 최종 출간되었다고 한다. 추가된 두 편에서는 미카엘의 인도로 아담의 후손들이 겪는 역사적 사건들이 환상의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는 유령의 인도로 스크루지 영감이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하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과 유사하다. 밀턴은 11편과 12편에서 아담과 하와의 에덴 추방을 명확히 하고 싶었던 듯하고, 악의 확산과 선의 회복, 궁극적으로 전능자의 은총에 대한 확신을 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낙원]에 신적/종교적 요소를 추가로 보완한 것이다. 만약 10편에서 마쳤더라면, 입체적이며 인간적인 고뇌를 짊어진 아담이 분노와 고통, 고뇌를 극복하고 은총에 대한 희망으로 나아가는 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요즘의 감각이나 트렌드에는 더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밀턴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딪히는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그는 두 편을 더 써야 했을 것이다.

추가된 두 편에서 나는 오랜 개인적인 의문을 - 유대의 신은 어떻게 인류의 신이 되었을까? - 반쯤 해결했다. 분명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간이고, 그들에게서 나온 자식들이 인류를 구성했다. 처음에 신은 초기 인류 모두를 그의 창조물로 인식했는데, 어느 순간, 그의 따뜻한 시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만 모아진다. [실낙원]에서 이런 선민에 대한 분명한 계기와 구분은 없지만, 이것은 모세의 등장 즈음에 의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즈음 전능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지성소에 머물고, 그들에 의하여 점유된다. 이제 전능자는 야훼가 되고, 다윗의 자손에게만 세속 왕권을 부여하는 전능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들만의 성주신에 머문다. (분명 모세의 음모, 혹은 사탄의 재기로 보이는 틈이 이곳에 존재한다. 현대의 밀턴이 존재한다면 이 음모와 틈에 대한 시를 읊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성자)에 의하여 최초의 인류가 짓고, 그동안 지속되었던 ‘인류의 원죄’는 사함을 받는다. 그래서 예수의 존재와 그의 처절한 고통의 대속과 은총을 믿는 사람 모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더라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즘의 기준으로 그의 고행과 끔찍한 죽음이 대속으로 치부될 정도로 극적인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현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라! 세대를 이어가며 고통받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을 보라!), 암튼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전능자는 다시 그의 시야를 넓히고, 인류 전체를 다시 그의 눈과 가슴에 담기 시작했다.

요즘의 우리나라 상황이 그래서인지, [실낙원]을 읽으며 나는 ‘성경의 해석’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기독교 사이비의 모든 경전처럼 밀턴의 [실낙원] 역시, 성경의 해석을 그의 방식으로 일으킨 것이고, 그 방향은 자본주의의 태동과 역사의 보폭을 같이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식 위에 세워졌다. 전능자의 입을 통해 강조되는 자유의지가 그러하고, 매우 인간적인 아담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들에 대한 은총을 낙관하는 아담의 치밀한 계산과 뻔뻔함이 그러하다. [실낙원]은 어떤 분명한 의도를 지닌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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