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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토머스 S. 쿤 2.

by YT

목표(지향점)가 잘렸다. 지적 사실에 대한 누적을 정상과학의 범위로 한정하고, 패러다임 간 공약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 쿤은 과학연구를 공동체의 공유 가치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횡보하는 쓸쓸한 인류의 뒷모습으로 그렸다. ‘패러다임’이라는 그 유명한 용어의 영광에 가려 진정 쿤이 말하려 했던 것은 대중에게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날카롭고 차가운 과학의 엄정하고 이성적인 이미지의 아우라를 걷어버리려 했다. 이것이 패러다임 자체보다 중요한, 내부고발자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의 진정한 의도였다.

진보는 무엇인가? 쿤도 책에서 간단하게 예를 들고 있지만, 미술사를 통해 한번 살펴보자. 인상파의 미술 혁명은 기존의 ‘자연에 보다 가까운 모사’라는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작가의 주관을 드러내면서 발생한 것이다. 인상파의 미술사적 승리를 통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회화가 자연의 묘사일 필요가 없으며, 작가와 사회의 주관과 개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했다. 과연 이러한 인상파의 혁명을 진보라 할 수 있을까? 이미 동양에서는 인간의 고고함을 대상에 녹이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등장하는 ‘극사실주의’는 퇴행일 뿐일까? 인상파의 패러다임 속에서 축적된 사고는 따분함으로 빠져들었고, 몇몇 사람들은 극사실주의로 돌아섰다. 인상파의 패러다임은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 앵그르와 같은 신고전주의를 비판하던 초기 인상파의 용기는 이러한 퇴행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대 정치영역에서 우파의 득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분명 험악한 과거로의 퇴행에 불과한, 이러한 지구적 현상에 대해 ‘아무튼 세계는 앞으로 나아간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는 시간의 축에 가치를 더한 개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좋음’이 누적되는 과정으로 진보를 이해한다면, 문제는 ‘좋음’에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좋음’의 가치는 동일한 패러다임에서만 누적된다. 다른 패러다임과의 관계에서 ‘좋음’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고, 시간의 변덕에 불과하다. 여기에 양자역학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적용하면, 시간의 축도 붕괴된다. 이쯤 되면 세상은 ‘막 나가는 것이고, 갈 때까지 간 놈’이 된다. 그 속에서 진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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