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by YT

소설을 읽는 내내 아팠다. 소설 속 메리처럼 가슴 안쪽이 아팠다. 어릴 적 아버지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무너져가는 메리의 삶이 슬펐고, 그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리처드의 처지와 고집이 안타까웠다. 20년 전 조벅공항으로 향할 때 붉은 흙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허름한 양철 지붕 판자촌이 생각나 슬펐다. 키 높이로 쌓여 꿈틀거리며 흐르는 먼지 속, 변두리 시장이 생각나서 안타까웠다. 작열하는 태양에 달궈진 양철 지붕 아래의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혔고, 하늘을 찢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하여 답답했다. 이민자에게 있기 마련인 희망은 진작에 태양의 열기에 부서졌고, 고단한 가난과 관계의 불안만이 남았다. 메리의 불안은 무서움에 기인하고, 무서움은 공포로 발전하며 메리를 좀 먹었다. 드 넓은 농장의 언덕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린 메리가 안타깝다. 인터넷의 댓글에 있듯 열기를 없애 줄 양철 지붕만이라도 바꿨다면 어땠을까?

센 척 채찍을 휘둘렀지만, 그녀는 모세의 눈빛에서 무서움을 느꼈다. 이민자에게 희망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도 같다. 희망이 도전받는 순간, 덤불 속에서 불안이 자라고, 그것은 중국에 가서는 무서움/두려움/공포가 된다. 이것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져 짐승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야 한다. 희망은 의지에 의하여 지탱될 수 있지만, 의지는 기질에 의하여 쉽게 상처받고 약해진다. 희망은 구조에 의하여 받쳐지지만, 구조의 대의에 의하여 버림받고, 구조에게서 퇴출될 때 의지는 외롭게 되고, 서서히 밑동에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른 아침 리처드가 농장으로 나가면 서서히 달궈진 양철 지붕의 열기와 싸우며,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덤불을 대하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메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토니는 어떤 길을 걸을까? 영국에서 이민 온 지 2-4주 밖에는 안된, 주입된 영국의 박애주의 스탠더드를 장착하고, 남아프리카에 이식된 토니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에겐 네 가지의 선택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가 영국에서부터 챙겨 온 책 속, 대성공의 신화 로즈의 삶일까? 아니면 발 빠르게 이민자의 구조에 적응하고, 그 구조의 집행자가 된 찰리의 삶일까?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믿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만 가려는 리처드의 삶일까? 아니면 희망을 잃고 무너져 내린 메리의 삶을 살 것인가?

오래전 중동에서 일하며 만났던 현지인들과 그들과의 대화와 교류가 독서 내내 떠올랐고, 몇몇 유사한 사건을 추억 속에서 꺼내어 반추하며 당시의 답답함이 소환되는 것 같아 많이 아팠다. 오래전 일이지만(그렇기에 소설 속 상황과 더 유사하다)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그 막막함이란…, 또 그 외로움이란…, 마치 동물의 아가리에 떨어진 듯,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불안과 무서움.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 가슴 안쪽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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