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박지리

by YT

나는 ‘성장 드라마, 성장 소설’이라는 명명에 동의할 수 없다. 중고생들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작품의 카테고리를 ‘성장’으로 규정하는 건, 청소년은 미숙한 존재이며, 사회가 규정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되어야 한다는 관성적이며 권위적인 인식을 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다음 세대에 대한 언어폭력이다. ‘주린이/부린이’ 같은 말들이 어린이를 비하하는 말이라며 쓰지 말자 하면서, 탄탄한 이성석 분석과 사유의 기반에 세워진 문학 평론의 영역에서 여전히 문학의 카테고리로 ‘성장’을 쓰고 있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맨홀] 속 이야기는 50이 넘은 나의 현실로 치환되어 나의 후회와 고통을 자극한다. ‘성장’이 아니라 [맨홀]은 고통의 구멍이 뚫린 ‘인간’에 대한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시간은, 마치 밤새 내린 눈이 밤사이 세상을 순수의 백(白)으로 덮어버리 듯,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고 덮을 뿐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못한다. 상처는 그 주인과 같이 죽을 때나 묻힐 것이다. 어릴 적 그 사람(주인공인 ‘나’의 아버지)으로 인한 학대의 고통은 현재의 ‘나’를 짓누르는 무게이고, 공포의 기억인 ‘맨홀’이다. 폭력을 피해 누나와 달아나 숨었던 맨홀은 탈출구이기도 했지만, 죽은 ‘파키’를 던져놓은 후, 맨홀은 학대의 기억을 일깨우는 고통과 두려움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나’는 공포의 구멍으로 뭉쳐진 그림자일지 모른다.

소설은 ‘고통과 공포’에 중심을 맞추기보다,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가 이야기 내내 끌고 가는 것은 어떻게 자신과 현재를 화해시킬 것인가에 있다. 주인공 나의 기저에는 현재를 다시 살고자 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과거와 기억의 타협이고, 엄마의 눈물과 누나의 변심에 대한 이해다. ‘나’는 살고 싶어서 버둥대는 것이다. 그 노력이 애처롭다. 마지막 장면으로 추측건대, 아마도 ‘나’는 이런 변화와 마음 바꾸기에 실패할 듯하다. 폭력의 피해자는 다양한 형태로 그 폭력의 상처를 안고 산다. 아버지가 죽은 후의 ‘나’처럼 아버지를 닮아가기도 하고, 치를 떨며 그 반대방향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중간 어디쯤의 방향(적당히 섞인 폭력과 사랑)으로 뛰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폭력과 고통의 기억은 그에게 계승된다. 하지만 ‘나’처럼 그것이 폭력의 전이(엄마와 누나에게로)가 되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 고통은 그 계승자를 꿈틀 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것은 살고자 하는, 편안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일지 모른다. 이경우 계승자는 자신의 기억과 타협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진다. 이것이 바로 변화에의 시도이다. – 어쩌면 이 변화 때문에 ‘성장 소설’이라고 명명하는지 모르겠다. - 그 방법은 영화 ‘밀양’에서 어린이 유괴범의 경우처럼 신으로의 귀의가 있을 수 있고, 과거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현재의 시공간에서 탈출하여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이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 두 방법을 사용할 수 없는 ‘나’는 과거의 기억을 자극하는 현재 상황에 다시 놓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과거의 상처를 계속 덧나게 하는 방법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방법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정을 긴장시킨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변화는 죽음으로 흘러갈까 두렵다.

변화는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좀 더 따듯한 온기로 상대를 바라보기 등으로 시도될 수 있다. [맨홀]의 ‘나’ 역시 자신의 기억과 현재의 불만을 타협시키기 위해 은연중 노력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것이라며 위로하며 시도했다. 이렇게 변화의 바탕에는 평안에 대한 욕구가 있어 균형을 맞추려 하고, 이것은 의도적인 사유(머리 속이기)를 통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긁힌 상처의 자국은 그의 뼈에 새겨져 지울 수 없다. 관건은 얼마큼 오래 덮어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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