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강남순 교수 강의와 니콜러스 로일의 [자크 데리다와 유령들]을 읽고
2020년 6월 7일 유튜브에서 강남순 교수의 [자크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보고 난 후
새물결 아카데미라는 단체에서 진행하는 2016년 여름과 겨울에 걸쳐 행해진 강남순 교수의 인문학 강좌 [자크 데리다와의 데이트]. 1997년-98년의 열린사회 아카데미와 같은 포맷이다. 달라진 건 내가 유튜브를 통해 2020년에 강의를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7년 당시 30-40만 원 정도의 수강료를 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공짜로 이 멋진 강의를 접한다.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보며, ‘왜 그들은 거기에 있을까? 또 나는 왜 1997년에 거기에 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의/응답 시간을 보면 그들의 직업 군 역시 97년과 다를 바 없이 다양하다. 의사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자영업자도 있고, 고등학생도 있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을 인문학 강좌를, 귀한 시간을 쪼개가며, 서울에서 지방에서 모였다. 무엇이 이들을 그곳에 불러 모았을까?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이라는 책을 보다, 너무 어려워서, 개념적인 이해를 한 후에 책을 다시 보고자 유튜브를 찾았다. 인터넷과 유튜브는 이런 과정에서 매우 유의미한 프로세스다. 비록 바이어스가 낄 여지는 다분하지만 너무 어려운 책을 접할 때, 사전 과정으로 유튜브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지적 욕망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구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새물결 아카데미와 열린사회 아카데미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 단순한 지식만을 얻기 위해 그곳에 온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 모두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일상에서 질문을 던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산속의 스님들처럼, 도시의 스님들이다. 일상에서 구도자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1989년 내가 대학을 입학했을 때, 소련이 붕괴되고, 막스주의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물밀듯이 몰려들었던 것이 포스트 모던이었다. 그중에서도 데리다는 해체라는 칼을 마구 휘두르는 망나니로, 시대의 구원자 같은 느낌으로 폭풍처럼 다가왔다.
2020년 유튜브를 통해, 또 강남순 교수를 통해 접한 데리다는 사랑을 전도하는 예수처럼 묘사되고,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묘사된다. 데리다에게 ‘보편 진리’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불가능성)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계속 차이를 생산하며 지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꾸준히 계속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 속에 겸손이 자리하게 되고, 겸손은 모든 종류의 억압과 강제를 제거한다. 데리다에게 그가 다다르고자 하는 곳(보편 진리)에 대한 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큰 바람이다. 그의 철학은 거기까지다. 어쩌면 형이상학의 탑을 쌓지 않고,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구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사상은 동양의 제자백가와 비슷하고, 동양적 정서의 구도자의 삶과 매우 유사한 친밀성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강남순 교수를 통해 내가 알게 된 자크 데리다이다.
2020년 6월 18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니콜러스 로일
데리다를 다루었기 때문인지, 출판사(LP)의 다른 시리즈들과는 서술방식부터 약간 다르다. 저자는 사족처럼, 구성과 출판사 시리즈 물의 기획 의도에 대한 의문을 데리다를 인용하며 계속 던진다. 그리고, 이 책 역시 데리다의 생각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덕분에 30년 만에 접하는 데리다가 너무 어려워 강남순 교수의 유튜브 강의를 참조한 덕에 끝까지 읽어 낼 수 있었다.
강남순의 색안경을 끼고 데리다를 접했다. 더 자세히는 강남순과 이 책의 저자인 니콜러스 로일의 이중 색안경을 끼고 데리다를 접했다. 데리다에 대한 3차 text도 어려워 중간에 읽기를 그만두려 했는데…, 나의 무식함을 탓할 뿐이다. 가끔은 색안경들이 어려운 철학 책을 소화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데리다 식으로 표현한다면 ‘색안경으로 보는 데리다도 데리다다!’
데리다의 사유는 알맹이를 정제하며 진행된 서양철학의 거대한 흐름에 反한다. 자꾸 그 알맹이에 도전하고 허물어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허물어 버리려는 의도를 담은 용어가 ‘해체’이다. 그리고 해체는 좀 더 도구적인 ‘대리보충(Supplement)’, ‘디페랑스’, 개념으로 수행된다. 그리고 대리보충과 디페랑스로 해체를 감행하는 장소적 의미로서 텍스트, 글쓰기, 환대, 독서 등이 있다. 이런 해체작업을 통해 발견된 것이 불가능성, 죽음, 비밀 등이 된다.
데리다 작업의 중심 생각(?)은 정체성, 진리, 실재 등 전통적 알맹이의 진정한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대리 보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목적지에 대한 긍정보다는 과정에 대한 긍정이다. 꿈 및 광기의 짧은 순간으로 목적지에 대한 약간의 힌트가 보이지만, 그는 목적을 향해 가는 방향성에 논의의 무게 중심을 둔다. 알맹이의 경계에 대한 도전의 측면에서 존재와 부재, 유령성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데리다의 작업이 신비적이고, 메시아적이라 함은 경계선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알맹이로 가는 추진력으로 욕망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게 뭔가? 신파인가? 아니면 정말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내 짧은 소견으로 대리다는 대중철학자이다. TV에 많이 나오는 대중 철학자이다. 데리다는 철학의 외부에서 철학의 내부를 공격하는 전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데리다는 많이 곡해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데리다의 대단한 정치력이다.
2020년 6월 21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두 번째 읽기 1.
(~ 116페이지 까지 읽고서) 데리다의 문학에 대한 무한 긍정과 신뢰 부분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는 오스틴 읽기에서 언어의 분석을 통해 ‘진지하지 못한 것’의 삐져나옴에서 문학의 탄생을 보았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폭풍의 언덕]에서 ‘Come’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알맹이(본질)의 흐릿한 본질에 쇄도하는 표현 속에서, 창의성을 무한 긍정하고 있다. 문학의 확장성에 대한 긍정이며, 매우 자유스러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Be Free’의 가장 완벽한 실천으로서 문학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다른 텍스트보다는 문학작품들을 중심으로 해체 이론을 전개하고, 이러한 그의 문학 편향성 때문에 그의 독특한 사고가 초기 문학비평 분야에서 좀 더 활발하게 논의되었는 듯하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무한 신뢰와 긍정은 요즘 시대에 문학을 가장한 활자로서의 신문과 각종 프로파간다적인 언어들 때문에 오염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문학은 문학으로서 경계 지어져야 한다. 문학에 대한 데리다의 사고가 ‘민주주의’, ’ 언론’ 등에 확대 적용되는 순간 데리다의 해체와 사고는 Naive 해지고, 이용당하기 좋은 아주 순진한 도구가 되어버린다.
2020년 6월 22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두 번째 읽기 2. - 욕망
데리다를 읽으며 다시 내 생각 속으로 튀어 온 개념이 ‘욕망’이다. 욕망은 현대 대부분 국가 체계의 기반이 된다. 자본주의는 개인 욕망의 실현이라는 바탕 위에 세워졌다. 현대 사회는 욕망의 자람에 대한 긍정이 있고, 욕망이 좀 더 잘 조정되고 실현될 수 있도록 그 체계를 하나하나 세워왔다. 또,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집단적인 욕망으로 구분되는데, 집단의 욕망 역시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 개인과 집단의 욕망 실현의 관점에서 정치, 경제가 세워지고 문화는 욕망의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윤리와 정의 역시 이러한 욕망과 관계한다. 욕망의 실현에 방점을 둔 정치 및 경제와는 반대로, 윤리와 정의는 욕망의 통제에 그 목적을 둔다. 여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 종교가 되는 것이다.
욕망은 분명히 추진력이 있다. 데리다의 표현으로 보면 ‘자기 촉발’의 추진력을 가지는 것이 욕망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창의성이라는 이름으로 욕망을 장려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제한된 예술 분야 속에서만 이루어졌을 뿐 우리의 사회생활에서는 욕망에 대한 통제와 억제가 이야기되어 왔다.(욕망은 상자 속에 가둬졌다.) 욕망은 통제되고 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배웠다. 억제는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해 왔다. 욕망은 엔트로피 상태에 있다. 그것은 힘이 있고, 그 방향성은 우리가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욕망의 힘을 느끼는 요즘이다.
2020년 6월 23일[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두 번째 읽기 3. - 데리다의 핵심 개념 3종 – Supplement/ TEXT/ Difference (Differance(디페랑스)에 빨간색 오자 밑줄이 쳐졌다.)
(181 페이지까지 읽고) Supplement와 디페랑스는 비슷한 결을, TEXT는 결이 다른 것이다. Supplement는 구조를 분석할 때 적합한 개념이고, 디페랑스는 의미 작용을 이해하는데 적합한 개념이다. Supplement는 디페랑스 보다 다소 수동적인 성질이 보인다. 디페랑스가 자기 추동의 원리로 계속 차이를 만들어 지연시키는 것이라면 Supplement는 덧대어지는 것이다.
Supplement는 루소에게서 기원한 개념인데, 교육론에서 ‘자연 자체’의 대리 보충성을 부정하지만 데리다는 ‘자연 자체’도 대리 보충된 것으로 사유하면서 Supplement 개념을 자신의 핵심 개념으로 포섭한다. 어쩌면, 특히 교육의 분야에서, Supplement는 ‘體化’와 유사하다. 계속하여 자신의 몸에 각인시키는 과정으로서, 끝없는(완성 없는) 수양의 과정으로서 대리 보충이 있다.
TEXT는 열린 공간이다. 고정된 것이 아닌 훼손과 오염에 열린 공간으로서의 의미이다. 그리고 TEXT는 언어와 관련이 많은데, 언어는 늘 ‘언어의 타자’로 인하여 힘을 만들어 내게 된다. 걸작은 그래서 핵 폐기물에 비유되는 것이다.(아주 재미있는 꼭 맞는 적합한 표현이다.) 언어가 품고 있는 ‘이상하고 유령적인 힘’은 소쉬르 등 언어철학자와 구조주의의 관심을 사고 분석의 대상이 되면서 최근까지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힘을 가진 언어는 정치적이다.
디페랑스 城의 최고 존엄은 새로움이다. 그래서 디페랑스는 예술에 적합한 개념일지 모른다. 만약 이것이 사회와 삶으로 확장된다면, 새로움의 가치문제가 개입될 것이다. 디페랑스가 삶으로 나온다면 ‘미적인 삶’이 가능할 것이다.
2020년 6월 25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두 번째 읽기 4.
(258 page까지 읽고)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서의 문학을 다룬다. 문학의 자유는 내재하는 것으로, 이것은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언론의 자유와도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보는 시각과 관련된다. 매우 자유주의적인, 낭만적인 발상으로 확장성의 긍정만 이야기하는데, 분명 여기엔 이데올로기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카프카의 짧은 소설 [법 앞에서]가 인용되어 나오는데,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문학과 법의 기반이 허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엄중하고 진지한 것으로 여겨지는 법의 허구성, 문학의 허구성은 법을 구성하고, 문학의 내재적 자유는 민주주의의 바탕이 된다.
‘괴물들’ 障에서 작가는 잠시 괴물을 괴기스럽고/이상한 서술적 의미로도 사용하면서 읽기의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여기서 괴물은 지연된 미래가 다가올 때의 예상할 수 없는 모습에 대한 묘사로써 괴물을 이야기한다.(데리다에게 불경스럽게도(?)) 괴물은 예수의 부활이다.
이 장에서 내가 형광 펜으로 밑줄을 그었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절은 ‘모든 타자는 절대 타자다’로 데리다의 주요 윤리 개념들 – 정의, 책임, 환대, 선물, 용서 등 – 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윤리는 사유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국제법에 대한 관심/새로운 인터내셔널 같은 것으로 유추해보건대, 데리다에게서 윤리의 위치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이중 구속에 집중하는 ‘비밀의 삶’ 장에서는 ‘단독적인 것은 늘 일반적인 것에 구속된다’는 말이 와닿았는데, 그 구절은 1994년 정지영 감독의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