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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읽기

읽기의 오류

by YT

알베르 까뮈의 삶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의 고민과 닿아있다. ‘왜 사는가?,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나의 고민은 불교적인 것에 기인한 바 큰데 비해, 까뮈는 서양철학(실존철학)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 매우 황공하게도, 서양 지성사의 거두가 나와 갑자기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이방인]을 읽으며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까뮈의 ‘해석’이 마치 이방인에 대한 작가 노트처럼 보이는 [시지프 신화]를 읽으며 보다 분명하게 들어왔다. 까뮈는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 찼다고 단정한다. 부조리의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를 그는 고민하고 있다. 일단 까뮈는 ‘미래’를 제거한다. 미래를 제거하였으니, 당연히 내세를 이야기하는 ‘종교’ 역시 사라진다. 또 ‘미래’의 제거는 희망의 부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희망이 부재한 부조리한 삶/세상에서 개인의 입지는 3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 자살, 맞는 솔루션이다. 그래서 알베르 까뮈는 자살에 대해 [시지프 신화]에서 탐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살은 도피, 회피일 뿐 궁극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두 번째는 향수와 복고의 경우이다. 즉 종교로의 귀의/돌아감 인 것이다. 그때 인식했던 부조리의 현실은 마치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논리적인 것으로 재구성되는 듯 보인다. 즉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세 번째는 까뮈의 길로 살아보자!, 도전해보자!, 반항해 보자! 인 것이다. 정말 까뮈는 고단한, 죽어야 끝나는 지리멸렬한 의지를 앞세워보는 것이다. 이것은 시지프가 돌을 산정으로 올리는 힘든 행위와 관계가 있다.

부조리의 상정과 극복의 방법 제시 과정에서, ‘철학적 자살’이 대두되는데, 이것은 각성의 과정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각성이다. 불교의 깨달음, 해탈과 같은 것이다. 까뮈는 사유의 침잠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부조리의 인식에 대한 기쁨과 희열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 개인의 각성이 묶여 사회의 각성이 되는 것이기에, 그는 실제로 사회 활동을 통해 그의 반항을 표출하였던 것이다.(물론 그 과정이 녹녹지 않고, 이리저리 부조리한 과정이기는 했다.)

이러한 까뮈의 생각에서 문제점은 너무나 개인적인 각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작품을 주문했다 [페스트]. 유튜브에서 본 바로는 개인 간의 연대를 통해, 페스트를 극복한 이야기가 주제로 제시되어있다. 개인 각성의 사회로의 확장이 부조리한 세상의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두고 보자! 종교는 끊임없는 회귀와 회피를 일으키는 반대로의 벡터 방향성을 지닌 각성제 같은 것이다. 가끔 이것은 너무나 잘 작용해서 선동과 폭력을 일으키기도 하며, 사람들의 머릿속에 니코틴처럼 스며들어 있다. 점점 부조리를 각성할 수 있는 불똥은 잦아들 수밖에 없다. 반항은 점점 개미지옥 같은 종교의 아가리 속에서 작아질 뿐이다.


[시지프 신화] 읽기 2

책의 뒷부분 번역자 김화영이 쓴 작품 해설을 읽으며, 부조리의 개념에 대한 나의 이해와 번역자의 이해가 다름을 알았다. 번역자는 ‘부조리’를 각성의 순간으로 일고 있다. 그래서 부조리란 개념은 매우 긍정적인 개념이 된다. 의식이 순간적으로 다다른 각성의 순간, 그 순간 자체가 개인적인 체험의 관점에서 매우 부조리하기에 그는 의식의 각성을 부조리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습관에 젖어 살던 두터운 삶이 어느 순간 낯설게 보이는 모습을 부조리로 읽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해는 이와 다르다. 나는 먼저 부조리한 세상을 상정한다. 그 부조리한 세상은 사회적인 부조리함도 담고 있지만(세상의 이해할 수 없음), 까뮈는 지극히 개인차원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궁극의 도착점이 상정되면서, 개인의 모든 행동, 즉 미래를 향한 개인의 모든 행동들이 의미 없게 느껴지는 부조리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까뮈는 부조리한 세상을 탈출하는 방법으로 현재의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인식하는 의식과 사고에 의한 철학적 자살을 감행하고, 결국 ‘진리’(?)에 대한 각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역자가 ‘부조리에 대한 각성의 순간’으로 비유한 ‘사막’은 나에게 있어 철학적 자살을 통해 도달하는 각성 前의 척박한 정신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각성은 향수에 의한 회귀로 끝날 수도, 자살로 끝날 수도, 또 희망을 포함한 의지의 반항으로 승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읽기 3

역자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잘못 읽은 것 같다. 까뮈는 세상이 비합리로 가득 찼다고 이야기하며, 이것 자체를 부조리로 얘기하지 않는다. 명확함을 추구하는 의식이 세상과 맞대면하는 순간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부조리는 거대한 바위 앞에 선 시지프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의식은 왜 명확함을 추구할까? 까뮈는 디폴트로 이 사실을 전제한다. 이론적으로는 범주의 발견 등과 같은 것이 디폴트를 입증하지만, 감성적으로, 또 개인 각각의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자신의 의식, 사회 그리고 의지에 대해 울타리를 치거나, 새롭게 정의를 내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혼란스러워 살지 못하는 것이다.

까뮈 철학이 불교와 굉장히 유사한 부분에 대해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불교의 세상 일체 苦와 화두의 천착, 각성과 해탈이라는 프로세스는 까뮈의 비합리-부조리의 대면 –각성과 반항의 프로세스는 매우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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