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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모든 곳에 있다

by YT

정치의 산재와 보편성을 얘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권력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흔히 말하는 ‘정치권력’을 포함하여 인간의 삶 자체는 관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것으로 흐르듯 우리의 관계는 권력기반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물이 담긴 넓은 쟁반을 들고 있는 것처럼 매우 위태롭게 힘의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다. 힘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힘이 바로 권력의 저변을 형성한다.

남녀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회사에서의 직급의 차이, 동료 간의 영향력의 차이 등은 자연스럽게 힘의 벡터 방향을 결정하고, 권력을 만들고, 그 권력을 더욱 크게 만들거나, 공고하게 하는 작업이 정치다. 정치 과정에 전략과 전술이 동원되고, 선전과 선동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치를 배우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치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정치는 모든 곳에 있다.

그럼 우리 인간은 정치적인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혼자서 살아간다면 정치적인 것과 멀어질 수 있을까? 혼자 사는 경우라도 식물과 타 동물과의 관계를 형성해야 하므로 마찬가지로 상하 관계가 나타날 것이고, 그런 경우라면 혼자 사는 사람과 대상 간의 관계도 정치적인 관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정치적 속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이러한 정치적인 속성이 지양해야 할 나쁜 것인가? 이 현실적으로 버릴 수 없는 정치를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합리적으로 이용하며, 통제 가능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정의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윤리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윤리는 참 반 인간적인 개념이다. 정의 역시 반 인간적인 개념이다. 누가 윤리를 말하고, 정의를 말하는가? ‘윤리와 정의를 말하는 순간’ 발화자는 즉시 권력과 정치적 활동의 기반에 서게 된다. 윤리는 발명자와 그 후손에 의해 이용되고 정치화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이며 종교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무슨 개념을 들고 나올 때마다, 그 순수는 없어지고 미뤄진다. 어쩌면 데리다의 ‘디페랑스’가 이 얘기인 것 같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하고 싶은 저 밑에서 터져 나오는 울림이 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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