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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사상가 폴 비릴리오] 이안 제임스

by YT

속도라는 물리학의 용어가 철학자에 대한 형용사로 붙여진, 낯선 느낌이어서 선택했다. 미술사조 미래파의 이론적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비릴리오에게 속도는 그의 주된 관심사인 기술(현대 과학) 비평으로 들어가는 철학적 바탕이고 매개가 된다. 이 세상은 속도의 지속적인 증가라는 형태로 계속 이어져 왔으며, 본질적으로 이 속도는 우리의 지각과, 더 나아가 인식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우리의 지각에 가하는 제한은 원격 현전, 가상화를 통해 우리를 실재의 세계로부터 분리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기술에 대한 비전은 매우 암울하다고 하겠다. 그의 철학에서는 몸이 위치한 곳으로써의 시간과 공간이 매우 중요한데, 비록 그가 도시계획분야에서 30년을 일했지만 시간의 문제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된다. 속도의 증가와 더불어 공간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그의 매체에 대한 비평은 학교에서 배웠던 이론들을 생각나게 한다.(나는 신방과를 나왔다)

하지만, 그의 생각들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 역시 ‘플라톤의 변주’에 지나지 않음을 느낀다. 서양 철학사는 기본적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분명히 핵심적인 진리가 있다’라는 플라톤 이론의 이런저런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이야기와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의미’를 찾아가는 폴 리쾨르의 철학이 그러하고, 사람들의 행동 너머 무의식을 이야기한 프로이트가 그러하고, 정치/사회/문화에 대해 경제의 우위를 강조한 막스 역시 플라톤의 변주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비릴리오 역시 보이는 것 너머의 의미와 속성을 찾아간다는 면에서 서양철학의 플라톤 변주의 하나 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비판자들이 말하는 그의 사상에 담긴 미학적 요소는 정말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의 사유체계를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가로수들이 옆으로 휭휭 지나가고, 공중에서 수많은 폭탄이 비처럼 떨어지고, 거대한 미사일이 나를 너머 지나가고, 대서양의 나치 벙커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고, 텔레비전 뒤에서 킥킥거리는 음모자들이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의 사유와 철학이 운동과 속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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