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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존재론] 이중원 외

by YT


나는 [인공 지능의 존재론]의 대표 머리말을 쓴 이중원이다. 오늘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최종 4대 1로 패했다. AI가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놀랍고, 당황스럽고, 왠지 무서운 불안이 뒷목을 타고 넘어온다.

AI가 인간과 공존하는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자율 주행 자동차의 현실화를 두고, 제도적 법적 장치의 정비가 강조되는 지금, 우리는 AI 보편화 시대에 대비해 그동안 인간의 것으로 만 여겨지던 지능, 감정, 자아, 자율성, 인격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릴 필요가 있다. 철학자들을 불러 모아야겠다. 그들에게 각각 주제를 주고 논문을 준비하도록 해야겠다.


(1년의 시간이 지난 후) 나의 의도가 잘못 전달된 것일까?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정도의 톤으로 ‘긍정의 가능성’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많은 연구자들이 여전히 인간 고유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일단은 저항’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밥 먹고 살았던 것에 대한 애착이 인간 고유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AI 논의 가능성의 문을 닫으려 하고 있다. 내가 왜 그들을 모았고, 내가 왜 1년을 기다렸는지 답답할 뿐이다.

그리고 9명이 모두 똑 같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논문을 시작한다. 한 책에 아홉 번의 중복이 나타난다. 모두의 초고를 받고, 출판 전에 적어도 몇 번의 통합 논의가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친구들과 출판사를 믿었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개인 사정으로 잊고 있다가 받아본 책은 아홉 편의 논문이 병렬로 실린 논문집일 뿐 한 권의 책으로서 통일성은 없다. 이 책에는 아홉 번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호들갑스럽게 그려진다.

이성, 감정, 자아, 자율성 개념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여전히 어렵고, 분명해질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긍정의 가능성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연구와 규정을 AI 논의에 끼워 넣고 있다. 가당치 않은 일이다. 어떻게 1백 년 전 인물의 통찰과 2천 년 전 인물의 연구가 AI의 긍정의 가능성을 논하는 장에서 인용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의 통찰을 그대로 썼다면 너무나 오래된 틀을 씌우는 것이고, 그들의 통찰을 부정하는 것은 괜히 AI의 A자도 모르는 늙은 우리의 선배들을 과거에서 불러내어 창피를 주는 꼴이다.

우리는 새로운 틀을 도입해야 한다. 논문들의 곳곳에서 나오는 ‘관계성’이라는 개념에서 ‘긍정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관계성의 도입으로 지능도, 감정도, 자율성도 좀 더 말랑해질 수 있다. 이 말랑해진다는 말은 AI와 공존할 수 있는 미래 사회에서 가치의 부딪힘 없이 좀 더 원활한 공존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관계성의 개념이 맞다/틀리다의 구분을 떠나서 AI를 우리 사회에 도입하기 위한 사회 가치의 정지작업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럼 실천의 문제는 어떠한가? 과연 철학자들이 연구한 대로 관계성의 자율성으로 향후 AI 개발의 가이드와 지위가 부여될 것인가? 불행하게도 아니다. 철학자는 문법 학자와 비슷하다. 사람들의 다양한(방향성 없는) 언어 사용에 대해 추후에 당위와 규칙을 규정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마도 나와 친구들의 ‘이른 철학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AI 개발은 무분별하게, 사려 깊지 못하게 진행될 것이고, 수많은 가치의 충돌이 발생할 것이고, 마침내 그들이 보편화된 이후 보다 정교한 지능, 감정, 자율성에 대한 개념이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는 인간 고유의 소유적 특성으로 미리 AI 긍정의 가능성을 차단하기보다, 말랑한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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