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좋은 장소3_여름, 바다 그리고 아이스커피

드디어 북크닉의 계절이 온다

by 예온 YeOn

사람들은 흔히 ‘가을’을 일컬어 독서의 계절이라고 부르지만, 나에게 독서의 계절은 ‘여름’인 것 같다. ‘~이다’라고 하지 않고 ‘~인 것 같다’라고 애매한 표현을 쓴 이유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내가 각각 다른 시기에 쓴 글들에서 완전히 상반된 내용을 발견하곤 하는데,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 ‘여름’이라고 단언해 놓고서 나중에 다른 계절을 언급할지 누가 알겠는가. 봄날에 따스한 햇볕이 모이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그래, 역시 책은 감성 충만한 봄에 읽어야지.’라고 말하거나, 한겨울에 창 너머로 찬 바람이 왱왱 부는 소리를 들으며 ‘그래, 역시 안온한 이불속에서 책 파먹는 맛이 최고지.’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내 마음속 독서의 계절은 여전히 ‘여름’이다.


여름을 가장 책 읽기 좋은 계절로 여기게 된 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학생 신분이었을 때는 일년에 두 번씩 방학이 있었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니 긴 휴가를 써야 할 때 여간 눈치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덜’ 눈치가 보이는 ‘여름휴가’가 더욱 기다려졌다. 내가 근무했던 회사는 특히 여름 직전까지 정신없이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부족했다. 분주했던 일들을 하나씩 마무리할 즈음이면, 여름휴가 시즌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여름휴가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그리 거창한 건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 거기서 밀린 책들을 읽는 것이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고요히 생각하는 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래서 여름만 되면 그 즐거웠던 감각이 명징하게 되살아난다.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활동한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회사 다닐 때처럼 극도로 바쁘지도 않고, 휴가가 아쉬운 상황도 아니지만 나는 여름날의 독서를 기다린다. 북크닉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북크닉’은 책(Book)과 소풍(Picnic)을 결합한 말로, 야외공간에서 즐기는 책 읽기 문화를 일컫는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끼고 있는 해변이 나의 최애 북크닉 장소이다. 강릉에 살아서 가장 좋은 점은, 산이든 바다든 마음만 먹으면 곧장 자연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햇살이 뜨거워지고,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면 ‘때가 왔다’라고 느낀다. 나처럼 북크닉을 사랑하는 절친의 표정에서 나와 같은 마음을 읽는다.


우리는 간단한 도시락과 읽을 책들, 캠핑용 의자를 챙겨서 바다로 간다. 차가운 아이스커피도 잊지 않는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소나무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은 우리는 도시락을 먹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이내 책 속으로 빠져든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시원하고, 눈앞의 바다는 청량하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독서의 몰입을 돕는다.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바다를 바라볼 때도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가만히 응시한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다시 책을 읽는다. 아이스커피의 얼음까지 녹여서 다 마시고 나면, 슬슬 일어날 시간이라는 뜻. 짧지만 긴 여행을 한 듯 충만한 기분으로 돌아온다.


자연 속에서 즐기는 독서는 같은 문장도 다르게 읽히는 마법을 일으킨다. 감성이 증폭되고, 창의적 영감이 차오른다. 느긋하게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시간은 나에게 남다른 활력을 준다.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한시적 즐거움이다. 역시 독서의 계절은 ‘여름’이라고 단언해도 좋으려나.



마녀의 서랍_열 번째 칸

여름의 빌라 (백수린 소설집, 문학동네 출판)


내 삶에 중요한 축을 이루는 희로애락은 모두 여름날에 일어났다. 나에게 여름은 환희와 비애, 뜨거운 설렘과 차가운 체념이 공존했던 계절이다. 그래서 여름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비밀의 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는 이상하면서도 아련한 시간.


해마다 여름을 앞둔 나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그 어떤 순간들이 기대되면서도 두려워서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이 소설집 속 작품들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마치 그런 여름을 닮았다. 여름과 함께 닫힌 문이 열리면서 인물들의 감춰왔던 감정들이 쏟아지고 참았던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열린 문틈 사이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즐거워하며 하나의 계절을 흘려보내고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인간이기에.


나는 그런 소설 속 인물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불가해한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애와 환희와 설렘과 체념으로 점철된 여름날의 한가운데 있는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러 형태의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에 대한) 오해와 미움, 추측과 단정이 사라졌고 비로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전 09화책 읽기 좋은 장소2_내독 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