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고는 비어가도, 행복은 쌓이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창작하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누구나 ‘개인 작업실’에 대한 로망이 있다. 나 역시 오랫동안 나만의 작업실을 상상해 왔다. 서류로 어질러진 회사 책상에서, 직장 동료들 눈을 피해 책을 읽던 파티션 아래에서, 한잔의 커피로 오후의 졸음을 깨우던 회사 탕비실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싸인 작업실을 떠올렸다. 어떤 날에는 커다란 호두나무 책상이 놓인 기품 있는 작업실을, 어떤 날에는 바다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산뜻한 작업실을, 어떤 날에는 숲 속 오두막처럼 소박한 작업실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작업실의 형태를 마음에 그리곤 했다. 나의 오랜 로망은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2023년 12월 말, 10년 동안 근무하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팬데믹 이후로 회사는 어려워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전 직원이 퇴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퇴사 후 재취업을 서두르기보다 천천히 앞날에 대한 계획을 재정비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무조건 책을 많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출퇴근하던 습관 때문인지 평일 낮 동안 집에 머무르는 게 왠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어딘가 가야 할 곳이 필요했다. 퇴사 후 반년 동안은 단골 카페로 출근을 했다. 그렇다고 남의 영업장을 내 공간처럼 무한대로 쓸 수는 없는 일. 나만의 공간이 갈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퇴사한 후배 L (*‘책 권하는 마녀의 탄생’ 편 참고)이 함께 ‘작업실’을 구해보자고 했다. 혼자 하기는 어렵고, 같이 하면 수월할 것 같아 나도 주저하지 않고 그 제안에 응했다. 그래, 그러자! 당장은 수익 창출이 목적이 아니라, 그동안 회사라는 틀에 갇혀 무미건조해진 감성을 되살려보자고 겁 없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산한 동네에 자리한 작은 상가에 작업실을 구했다. 월세라는 고정지출 항목은 늘어났지만, 행복이라는 삶의 항목도 함께 추가되었다. 우리에게 작업실은 아지트이자 놀이터였다. 우리는 작업실에서 인생이 던지는 물음에 답을 찾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을 길렀다. 후배 L은 평소 관심 있었던 분야의 자격과정을 공부했고, 나는 클라이언트의 니즈에 맞춘 글이 아닌 내 목소리가 담긴 글을 썼다.
평일의 작업실은 후배 L과 함께였지만, 주말이나 휴일에는 (후배 L은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빴기 때문에) 작업실을 독차지했다. 고요가 스며든 작업실에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에 앉아 책장을 넘길 때면, 옅은 만족감이 마음 안에 켜켜이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리고, 내면의 힘도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서류 더미로 어질러진 책상이 아니라, 읽고 싶은 책 한 권만 놓인 책상과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채운 책장이 있는 작업실은 내가 바라는 삶의 축약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작업실은 그동안 마음속에 그려오던 작업실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지만, 사실 내가 원했던 건 ‘나’의 본질을 마음껏 펼쳐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의 독서는 나의 참모습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만든다.
마녀의 서랍_열한 번째 칸
언제부턴가 내가 좋아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걸 느꼈다. 의도적인 거리 두기는 아니었는데, 즐거운 일보다는 나를 신경 쓰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일들에 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걱정거리가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길까 봐 걱정했다. 크고 작은 파도를 넘다가 파도가 없을 때는 수면 위에 드러누워 또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내가 인생을 제대로 못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조차 나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독립'을 통해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저자의 긴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채우고 그 즐거움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그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저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게서 멀어진 진짜 이유는, 어쩌면 감정이 나를 흔드는 것이 두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은 날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날도 있는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0'점에 가까운 감정 상태로 무난하게 살고 싶었던 것인지도. 좋은 상황에는 충분히 행복해하고, 나쁜 상황은 지혜롭게 이겨내는 사람이 진정한 독립=홀로서기를 할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애써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떠올려보고 곁에 두기로 했다. 그렇게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을 나도 시작해 보련다. 자기다움이란 혼자의 힘으로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지지대를 세우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