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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착한마녀 Nov 24. 2021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나를 키우는 것

"어떻게 자기 아이를 맘대로 못하지?"


내가 근무하는 학원에서의 일이다.  내 옆에 앉은 선생님이 학생 어머님과 통화를 막 끝내고 혼잣말을 꺼냈다.


"무슨 일 있어요?"

"00 이가 숙제를 안 해와서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요즘 스마트폰에 빠졌다고, 어머님도 어떻게 안된다고. 자기 아이인데 그게 맘대로 안되나? 이해가 안 가요"


내 경험과 진심이 담긴 말이 나도 모르게 세어 나왔다.

"잘 안돼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같아요. 내 아이를 내 맘대로 하는 거"



나는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들 중 유일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이를 키우지 않던 시절에는 나 또한 아이들은 부모와 똑같고, 부모의 의지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보며 그 부모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점점 내 아이들이 자라 영아기, 유아기, 청소년기까지 거쳐오면서 나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부모와 아이는 다른 인격체이구나!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도 있구나!'라고 말이다.

아무리 책을 보고 이론으로 익힌다 해도 내가 몸소 경험하고 체험해서 터득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내 경험을 통해서

'아이들이 맘대로 안된다는 말', '왜 그러는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 '내가 낳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 이런 말을 하는 학부모님의 심정을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커지니 한 명, 한 명 안 예쁜 아이가 없고, 그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니 하나하나 공감이 되어서 더욱 애틋하고 간절하게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나와 분리되어 있는 또 다른 인격체, 하지만 나의 보호막과 울타리에 있는 한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책 읽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책 읽는 척을 했고, 채소를 먹이기 위해서 싫어했던 시금치를 좋아하는 척을 했고, 그토록 끼고 살던 티브이도 집에서 없애기까지 했다.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거실에서 애들이 볼 때 영어공부를 한다. 몰래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도 아이들이 나오면 후다닥 숨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아이들을 자라게 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들이었다.



육아서에서 엄마가 책을 읽으면 아이들이 따라 읽는다고 하던데, 쉽게 아이들이 바뀌진 않았다. 그걸 기대하며 행동했다면 나의 노력들은 이미 포기상태로 두 손 두발을 들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들을 계속 하다보니 어느덧 나의 좋은 습관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이들을 낳아서 기르기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은 오히려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가는데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통해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를 변화시키고 발전하는 과정이 아닐까?

아이들을 낳기 전보다 더 바쁘고 더 힘든데 더 부지런하고 더 열심히 살고 있다. 더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키워내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다.

'어린이는 어른의 어버이다'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나?


아이들이 나를 더 힘들게 할수록, 고민하게 할수록 나에게 성장할 기회를 만들어준 거구나!


지금 이 순간도 글 쓰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자 거실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글을 쓰고 있다. 언젠가 나의 글솜씨도 자라는 날이 오겠지? 


반백살에 가까운 나를 키워주고 있는 내 아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이라도 바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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