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쯤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첫 직장에 다니며 퇴근 후 멋진 여가생활을 상상하며 등록한 거였다.
물살을 가르며 두 팔을 멋지게 휘졌는 나의 모습,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마린보이 박태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상상은 금세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한 달 만에 수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자유형까지는 그럭저럭 흉내를 냈었는데 그다음에 배우는 배영이 문제였다. 남들은 배영이 호흡하기도 편안하고 손동작도 쉽다고들 하던데. 나에게는 배영이 공포 그 자체였다. 물에 편안하게 눕는 것이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 같았다. 마음을 다잡고 누워보려 애써도 몸이 번번이 가라앉는 바람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배영의 벽을 넘지 못하고 관두고 말았다. 그 뒤로 수영장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수영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배영의 공포이다.
요가 동작 중에 머리서기 자세가 있다. 흔히 물구나무서기라고 하는 동작이다. 예전 요가 수업 때, 이 동작을 앞두고 늘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아예 수준이 안 된다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 이리 쿵 저리 쿵 넘어지면서도 반복해서 시도하는 사람,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 아주 도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고 여유만만하게 1분 이상을 버티고 있는 사람,
나는 그중 부러운 눈으로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잘 버티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박수까지 열심히 쳐주었는데, 내심 질투가 났던 것이 사실이다. 나도 꼭 성공하고 싶었지만 배영만큼이나 두려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요가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가까워졌을 때 선생님께서 도와줄 테니 도전해 보라고 했었다. 팔꿈치로 버티고 머리를 땅에 박고, 발을 최대한 머리 가까이 가져와서 들어 올리면 된다고 했다. (늘 그렇듯 이론은 쉽다.) 하지만 다리를 들어 올린 이후의 세상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이 내 발을 꽁꽁 묶은 탓에 머리서기는 여전히 내게 미완성이다.
흙을 뚫고 나오는 꽃씨를 보았다. 껍질을 뚫고 작은 잎을 비틀고 나오는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눈물겹다. 컴컴한 땅 속 깊이 박혀있던 씨앗들. 편안하고 따뜻하지만 언젠가는 뚫고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 과감하게 나오지 않으면 세상과 연결될 수 없기에.
꽃씨가 뚫고 나올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나왔을까? 나오자마자 무거운 발꿈치에 밟혀 죽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차가운 공기에 바로 얼어버릴 수도 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환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렵다고 땅 속에만 갇혀있다면 평생 따뜻한 햇빛도, 따뜻한 이의 손길도, 예쁜 꽃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배영이 그땐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기껏 실패해봤자 물이 코나 입으로 들어가서 잠시 ‘콜록콜록’ 했을 뿐인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두려움을 조금만 떨쳐버리는 연습을 했으면 되었을 텐데. 그때 당시에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이겨내지 못했다. 지금 내가 도전해야 할 머리서기자세 또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리저리 넘어져도, 실패한다고 남들이 비웃어도, 나를 믿고 두려움을 이겨가면서 꾸준히 연습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걸 안다.
땅을 뚫고 나온 어리고 작은 꽃씨의 용기를 배워야 할 때이다.
배영을 포기했던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작고 어린 씨앗에게서 용기의 싹을 한 움큼 받아서 키워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