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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벤지!

근친교배에 따른 강아지들의 고생 그리고 잡종강세

by 아자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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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낡은 영화 한 편이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세상에 흔한 믹스견 한 마리가 스크린 속 영웅이 되는 이야기, 영화 '벤지'는 어린 시절의 익숙한 추억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의사가 되어 다시 마주한 '벤지'의 이야기는 단순한 향수를 넘어,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속 주인공 '벤지'와,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믹스견의 가치에 대한 고찰입니다.


1974년에 개봉한 영화 '벤지'는 주인 없이 마을을 떠돌지만 모두의 사랑을 받는 믹스견 '벤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벤지는 자신을 아껴주는 어린 남매가 유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무도 개의 경고를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기지와 용기로 아이들을 구출해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벤지는 단순한 동물을 넘어, 한 가족과 마을을 구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순종(Pedigree dog)'이라는 가치에 집중해왔습니다. "개처럼 굴지 마라"는 관용구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의 가치는 종종 인간의 편의에 따라 규정되어 왔습니다. 인간은 투견, 목양견 등 특정 목적을 위해 개의 유전형질을 인위적으로 개량했으며, 애견협회(Kennel Club)는 외형에 치중한 혈통 기준(Standard)을 만들어냈습니다.


수의사로서 필자는 이러한 인간의 욕망이 초래한 여러 문제점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예로, 어깨가 골반보다 넓어 순산이 어려운 불독과,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은 신체 구조로 인해 척추 디스크 질환의 위험을 안고 사는 닥스훈트를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특정 외형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교배는 유전적 다양성을 감소시켜 특정 질환에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교배의 위험성은 비단 동물의 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권력과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수 세기 동안 근친혼을 반복했습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 턱'으로 불리는 심각한 부정교합이 유전병처럼 대물림되었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인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턱 기형이 너무 심해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권력을 위해 '순수한 혈통'을 고집했던 왕가의 비극은, 특정 외모를 위해 '순종'을 고집하는 오늘날의 반려견 문화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례가 근친교배의 위험성을 보여준다면, 반대로 유전적 다양성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개념이 바로 **'잡종강세(Heterosis)'**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유전 형질이 섞이면서 부모 세대보다 우수한 형질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잡종강세 효과 덕분에 믹스견은 특정 유전병에 대한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경향이 있으며, 한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다양성이 확보될 경우 몇 세대 안에 많은 유전적 결함이 자연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순종견들이 겪는 유전적 어려움을 고려할 때, 믹스견의 건강함과 강인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이러한 세간의 편견에 맞서, 영화는 '벤지'라는 캐릭터를 통해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 속 주인공 벤지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발탁된 '히긴스'라는 이름의 배우견이 연기했습니다. 제작진은 혈통이 아닌, 교감 능력과 생명 그 자체의 가치를 스크린에 담아냈습니다. 영화는 동물이 겪는 고통을 자극적으로 전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스트레스 없이 행복한 동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교감과 생명의 존엄성을 이야기합니다.


영화 속에서 벤지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렸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반려견을 맞이한다는 것은 혈통이나 외모가 아닌, 하나의 온전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입니다. 유기견 보호소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수많은 '벤지'들이 새로운 가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성숙한 반려동물 문화를 만드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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