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기

by 독나리

늙음은 상실한 세월의 허망함이 아니다. 헛되이 보낸 청춘의 앙갚음이다 ㅡ쇼펜하우어

어떤 친구든 요즈음은 친구와의 만남은 거의 즐겁다. 조금 풀렸다고는 하나 역시 쌀쌀하다. 창문을 열어보고의 느낌이다. 잔뜩 끼어 입고 나갈 준비를 하노라니 몸이 휘청거린다. 모가 들어간 혼방 롱코트는 얼마나 무거운지 입고 나갈 때마다 몸이 휘청댄다. 그런데 색상이 마음에 들어 입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연보라색이다.


오늘의 모임장소는 내가 지하철 타고 4 정거장만 가면 되는 위치다. 때때로 이곳에 사는 게 진력나서 옮겨볼까 하다가도 주저앉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교통의 편리함이다. 다른 이유가 또 있지만 말이다. 오늘 초대는 오랫동안 미국에 살다 이제 퇴직 후에 미국반 한국반을 오가며 살고 있는 송도에 사는 친구다. 이 친구를 만나면 에너지가 솟아난다. 나이 듦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친구다. 오늘도 말에 활력이 넘쳐나는 그녀에게 동화되어 나도 목소리가 커진다. 부부가 보통 우리 나이가 되면 서로 취미가 맞지 않는다든가 어느 한 사람의 건강이 안 좋다든가로 인해 따로의 삶을 이어가는 부부가 많은데 이 친구 부부는 여행을 좋아하는 공통된 취향이 있고 건강도 하니 둘 다 은퇴 후 여행을 많이 다닌다. 아이 둘은 각자 미국 여기저기서 나름대로 자기들 생활을 잘하고 있으니 이 부부 걸리는 게 없이 자유롭게 이곳저곳 잘도 다닌다. 그 친구와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같이 다녔으나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나 동창이라는 친밀감에 요사이 몇 번 만나게 되었다. 에너지가 많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학교 졸업 후 세월이 흘러 이제는 비슷해진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마주 앉았다. 한창 일할 때는 나름대로 각자의 분주한 생활로 일상의 결이 달랐으나 은퇴 후의 일상들이 이제는 거의 비슷해졌다. 전공이 같은 친구들이니 각자 이곳저곳에서 나름대로 밖의 일을 해왔다. 일한 후유증으로 이런저런 몸의 이상이 있어 오늘은 손가락의 변형에 대한 화제도 있었다. 누구는 특수병동에서의 주사액조제로 손가락의 과도한 힘사용. 누구는 약국에서의 연고튜브와의 과도한 씨름. 등이 원인 일거라는 추측들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손은 많이 변형되어 있었다. 다행인 것은 처음에는 얼마간 통증이 있었는데 지금은 통증이 없단다. 병원에 가 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어서 큰 회복이 없는 데 장기간 약을 먹는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 병원 가기를 멈추었단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약한 변형이어서 그들 앞에 입도 뻥끗 못했다. 이렇게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삶은 몸과 마음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오늘 초대해 준 친구는 미국 종합병원에서 7여 년 약사로 일하다 그곳에서 개인약국을 열어 일하다 접은 친구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 집에 갔을 때 그 친구 약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활발한 그녀의 성정대로 직원을 거느리고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또 한 친구는 서울 중심부에서 자그만 약국을 운영하던 친구다. 나의 약국과 지하철 몇 정거장 떨어진 거리였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서로의 분주한 일상으로 그때는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나머지 친구는 그저 공부 잘해서 곱다랗게 학교 나와서 결혼 후 약국과는 전혀 멀게 지내온 친구다. 보통 병원이나 약국에서 일해 온 친구들은 그들에게 '팔자 좋은 친구들'이라 칭했다. 지금이야 여자들이 직업전선에서 일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이지만 그 시대 에는 여자가 밖의 일을 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대학졸업 후 곧 결혼해 집 살림에 젖어들었다. 나도 아이가 어렸을 때는 직장을 가질 생각 못하다 아이들 큰 후에 약국을 시작했었다. 여하간 그 친구는 팔자 좋은 친구로 칭해진 친구 중에 하나다. 물론 그런 친구들도 가정생활의 어려운 점이 많았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크고 착하다. 이렇게 모였으니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며 몇 시간을 떠들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동창이란 이렇게 공통의 화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어서 좋다. 이제 날이 풀리면 언제 또 보자며 헤어졌다. 서로가 많이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어서 다시 만나기가 조금은 힘들어도 어느 날 따뜻해지면 다시 꼭 만나야겠다.


'늙음은 상실한 세월의 허망함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다' 오늘의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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