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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7월은

청포도의 고향

by 이준희

# 수필


간밤에 장맛비가 한줄기 슬쩍 지나친 탓인가. 나뭇잎의 푸름이 진한 빛을 내뿜는 싱그러운 7월의 아침이다. 오늘은 청포도의 고향 안동에 가는 날이다.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고 안동행 버스에 오른다. 이육사 문학관 관장인 고향 친구의 초청으로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다. 타향살이하는 객이라서 인가 설레는 마음을 안고 대전에서 두어 시간을 달려 안동 터미널에 도착하니 친구가 일찍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해후다. 덥석 잡은 손은 그 옛날의 손이 아닌 듯 무딘 촉감이 세월의 흐름을 알리는 것 같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수많은 시간이 휘어져 돌아올 수만 있으면 참 좋으련만 어디 인력으로 될법한 일도 아니고 흘러가는 세월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 외곽에 있는 종합터미널을 출발해 시내를 가로질러 안동 댐 입구에 다다른다. 댐 좌측을 끼고 북쪽으로 30여 분을 올라가면 성리학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도산서원을 만난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도산면 사무소가 있다. 이어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좁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퇴계 선생이 5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술에 정진한 곳이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계상학림이 있다. 계상학림(溪上學林)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천 원 권 지폐 뒷면에 그려져 있고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라는 그림이다. 이곳을 지나면 이육사 선생의 문학관이 저만큼에 보인다. 여기가 행정상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번지이다.

육사 선생 문학관 바로 길 건너에 안동호가 코앞이다. 한때는 옹기종기 모여 있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수몰되어 아무것도 없다. 담장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장독대와 앞뜰에 핀 채송화의 추억 어린 마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저 물밑에는 그때 그 마을이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뿐이다. 인가가 없는 시골 길섶 한 곳에 현대식 건물로 세워진 문학관을 보니 다소 썰렁하다. 차라리 초가집이나 한옥으로 건축되었으면 분위기가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로 들어서니 먼저 “광야”의 시문과 눈길이 마주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이 육사의 대표작이자 미래지향적인 시이며, 때 묻지 않은 신성한 미래를 노래한다. 읽어도 또 읽고 싶은 중독성이 강한 시이다. 제1실에서 3실까지 둘러보고 안내판을 따라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좌측으로는 육사 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육사 선생의 생가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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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포도 시비가 있다. 시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언제 읽어도 정겨운 시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고향의 정서가 담겨있는 시가 아닌가.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과 식민지하의 억압된 현실을 이겨 내고자 하는 극복의 의지가 애잔하고, 미래의 삶을 향한 애틋한 소망을 담은 시비 앞에서 떠날 줄 모른다.

육사 선생의 생가는 문학관 뒤뜰에 복원하여 놓았다. 육사 선생의 생가를 복원한 건 육우당이고 육 형제가 함께 자란 집이라 육우당이라 부른다. 내가 오늘 하룻밤을 유할 곳이 육우당이다. 육사 선생의 어린 시절을 느껴 볼 수 있는 곳, 오늘 밤은 정말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설핏 스친다. 육사 선생이 기거하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뜻있는 일인가. 시끄러운 세상에서 다친 마음을 잠시라도 다잡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녁이 되자 육사 선생의 고명딸이신 이 옥비 여사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한다. 미안한 마음에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막무가내다. 안동지역은 예로부터 집안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지 않는 것이 양반집의 법도이며 아직도 그 풍습이 남아있다. 유교 사상과 선비정신이 뿌리 깊이 박혀있는 정신문화의 고장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니 또 차 대접이다. 대청마루에 앉아 향긋한 차를 마시며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았으니 추억 어린 옛이야기가 주가 된다. 요즘, 이 옥비 여사는 단체 방문객에게 “나의 아버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신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일수록 가슴 깊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법이다. 그 아련한 추억, 사무치도록 그리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질곡 한 세월의 이야기를 나도 한번 들어 보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기회가 되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었다. 옆자리를 같이한 문학관 관장인 친구는 내게 오늘 정말 대박 만났다고 한다. 육사 선생님의 외동 따님이 손수 지어주신 저녁밥에다가 귀한 차까지 대접받았으니 얼마나 횡재인가.

그렇다.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 일이다. 숨소리마저 멈춘 한적한 시골 밤이다. 대청마루에 켜둔 알전구에 나방이가 제철 만난 듯 날아들고 솔바람이 계곡을 내려와 나의 볼을 애무한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소금을 뿌려놓은 듯 가득하고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달고 서쪽 하늘로 사라진다. 농밀한 어둠을 맛보는 시간, 짙은 7월의 초록 물이 가슴에 가득하다. 이렇게 운치 있는 분위기에서 마시는 차 맛은 어느 밀폐된 도심의 카페에서 마시는 차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정성이 가득한 차 한 잔의 예를 배우던 그때 시절의 생각이 떠오르고, 내일의 삶을 가꾸어 주는 소중한 우리 고유의 차 맛을 음미하다 보니 어느덧 어두움이 깊어진다. 오늘 밤은 분명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뒷산의 부엉이 울음소리 청해 듣고,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도 만나 볼 것이며, 두 손을 흠뻑 적시고 청포도를 실컷 따 먹을 것이다. 또 은쟁반에 놓인 하얀 모시 수건에 손도 닦아보면서 청포도에 취해 단꿈을 꾸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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