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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Feb 27. 2024

66. 주께 하루는 천년, 천년이 하루 같다 함의 뜻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66. 주께 하루는 천년 같고천년이 하루 같다 함의 뜻      


『사랑하는 자 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 후서 3장 8,9절)

~~~~~~~~~~~~~  성경 말씀  ~~~~~~~~~~~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전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하루가 얼마나 되는지, 또는 천년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고 함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주님이라 하였는데,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하심을 인정하고 하신 말씀이다. 

  주님의 하루가 천년이고, 주님의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신학자들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양하게 해설을 했다. 하지만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시간에 속박받을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시간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는 시간이란 있을 수 있다. 아니 인간은 시간에 속박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에 따라 창조의 과정을 이루신 것이다. 잠시나마 하나님도 인간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본분은 동일하시나 인간의 세상에 온 예수는 잠시 인간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루가 천년 같고 하나님의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말함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 역사하시며 심판과 멸망의 날을 기다리시며, 구원할 사람을 기다리셨던 것이 바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엄청 긴 세월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하루 같이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인간의 초기에서 인간의 최후의 날까지도 한눈에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묵상으로 읽는 베드로전후서 말씀/ 최희원 글>

     


  베드로 사도의 글을 읽을수록 놀람과 두려움이 앞선다. 그렇게 많은 신학자들이 베드로는 무식한 자라고 생각하고, 사울(바울)에게는 매우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부분의 신학의 이론은 바울의 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혀 무지하다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할 때에 선뜻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을 때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복이 있다고 하시며,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셨다. 한편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시몬(베드로)을 데리고 예수께 왔을 때에도 시몬을 ‘게바’라 하리라고 말하셨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한 1장 40,41)             


  초대교회에서 로마교회로, 로마교회에서 구교와 신교로 나누어지면서 복음을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베드로 사도는 어부였으니, 배운 적이 없을 거라며, 무지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말았다. 그러하다 보니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성경을 구성할 때에 지식인 바울 중심의 신약성서를 편찬할 수밖에 없었으며, 바울 중심의 신학사상이 바탕을 이룬 기독교가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인 것이다. 여기서 복음에 대한 비틀림이 시작되었고, 세상의 종교의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상당히 어렵고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신학자에게 물어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복음은 신학위에 놓아야만 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지만, 결국 바울신학 위에 교회를 세워지게 되었다. 

  왜 이런 말을 해야만 할까?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바울신학의 잣대로 판단하게 된다면, 엄청 이단적인 행위이며, 마녀사냥에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하시는 일조차도 이 잣대로 판단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가르침은 매우 신비롭고 놀라움이 많다. 그리고 엄청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사랑하는 자 들아! 하며 시작한, “주께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구구절절 많은 異說들이 있다. 인본주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로 이해하기가 쉽다. 즉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유사성, 재밌고 흥미롭지 않는가? 신도 인간처럼 희로애락이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신은 친구 같지 않을까? 인간보다 조금 힘이 있을 뿐이라는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겠는가? 인간처럼 신도 시간에 갇혀 있는 존재로 이해할 때에 그리스 신화처럼 신은 좀 초월한 존재로써 신의 하루가 인간의 하루와 다르겠지.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하루가 천년 같겠고, 천년이 하루 같겠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었어, 천지창조를 6일 동안이란 것을 6천 년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심판의 날도 칠천 년이 찰 때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아담 때부터 연수를 따져서 현재를 육천 년 중반으로 보아 말세로 보고 주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며 조급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구속된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하는 주의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한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면 베드로와 같은 깊은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베드로 사도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말세를 많이 말했으며, 그래서 곧 주님이 오실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주님의 약속이 더디 온다고 말하고, 조급함을 내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주님의 하루가 천년 같으며,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이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처럼 주님은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오래 참으시어 다 회개하여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니 멸망의 날을 늦추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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