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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r 04. 2024

69. 여호와의 산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69. 여호와의 산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편 24편 3,4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 오니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시편 15장)

~~~~~~~~~~~~~~~~~  성경말씀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가깝고 먼 곳에 있는 산을 찾아 오르는 모습을 많이 본다. 특히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간 등산인의 인터뷰에서 경악한 말을 듣고 엄청 실망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왜 산을 오르십니까?”, “거기 산이 있어 오른다.”

  이런 허망한 말이 유행처럼 번져나가 유행어처럼 되어버렸다. 일반 등산객들이 산을 내려와서는 술상에서 하는 말이, “산이 있어 산을 오르는 거지!” 크게 기대했었던 TV 시청자들은 기대했다가 실망을 했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오히려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표현에 많은 사람들은 감동하고, 감격하며, 메아리처럼 사람들 속으로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대화를 나누어보면, 아무 뜻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멋지지 않으냐고 말한다. 복잡한 세상에 뭘 따져하면서 우스개로 넘어가버린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사는 것이 장난일까?’하는 의문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특히 산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우스갯소리로만 넘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산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을 오르면서 마음이 편하다. 또한 산은 자연 그대로써 아름다움을,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에는 자연의 신비함을 알게 해 준다. 여기서 신비함이란 경관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산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상생공존(常生共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신비함을 받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보기 좋았다.”라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감탄사를 보여주신 것을 공감할 수가 있었다. 그런 산,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산인데, 어찌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니? 만일 산이 입이 있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찌 말할까?

  자연에는 자연법칙이 있다. 그러나 생물에게는 법칙보다는 관계가 있다. 동물의 관계, 식물의 관계, 인간의 관계 등등. 산에서는 자연의 법칙도, 뭇 생물들의 관계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산을 좋아한다.

  그걸 아는가? 법칙(法則)과 관계(關係)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고,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아는가? 언어적으로는 법칙은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나 관계는 상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창조자의 깊은 섭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빛이 있으라.”에서는 빛이 나타남과 동시에 명암(明暗)이 구별되고, 시공(時空)이 주어졌다. 이는 첫 번째의 법칙이 주어진 것이다. 다음은 “궁창(the vault)을 만들다.”에서 물을 나누어, 그 사이에 궁창을 두었다는 것에서 법칙이 주어졌다. 이처럼 창조될 때에 법칙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생물을 창조할 때에는 구역과 성장을 내포한 관계가 주어졌다. 풀과 채소와 과일과 나무 그리고 새와 물고기와 육지동물 등을 창조할 때에도 역시 관계성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더욱 관계성을 중요시하였다.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에서 인간의 관계성은 매우 넓다.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와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의미가 담긴 밀접한 관계를 주어졌고, 특정지역인 에덴동산에 거처를 제공함으로써 관계의 법주가 주어졌다. 그리고 언약을 정하시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호와의 산」이 등장한다. 시공간적 의미를 가지면서도 만물 속에 고착된 공간이 아닌 것이다. 즉 여호와가 머무는 곳으로 구별된 곳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도 골짜기도 아닌 산(holy mountain) 또는 거룩한 곳(holy place) 그리고 여호와의 산(the mountain of the LORD)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에 어느 장소를 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열린 곳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산에 머무는 자(者)라 함에 있어서 번역을 자(者)로 함보다는 사람(人)으로 표현함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오직 사람만이 해당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사람이 거할 수가 있을까?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람은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잘 지켜온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을 어린아이에서 볼 수가 있겠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어른들은 그리 말하지 않는가? 어린아이를 보며 천사 같다고 말이다. 여호와의 산에 설 자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예부터 오늘날에 이르도록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무시하고, 겁주고, 학대하여 왔다. 왜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보면 두 가지의 현상을 나타낼까? 한편은 천사 같은 마음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며, 다른 편에는 질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처럼 말이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이런 마음이 어른들의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자(者)들은 절대로 여호와의 산에 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보면 자신의 더러움이 보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실을 말하면, 거역하고 외면하는 것도 그러하다. 이러한 마음은 무엇인가? 교만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교만은 만 가지 악의 근원인 것이다. 거기서 죄악이 나오는 것이다.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것도 이런 인간의 교만에서 발생된 악한 마음인 것이다.

  그걸 아는가? 교만은 정직을 제일 싫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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