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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r 31. 2024

64. 꼬마 거지

[독서와 생각]

64. 꼬마 거지     


  세계 도처에서 만나는 야위었지만 맑고 영롱한 눈을 가진 슬픈 아이들, 한 손으로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에게 구걸을 한다. 

 ‘Hungry… Money… Food …'

  울음 섞인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이들, 그런 슬픈 눈길을 마주치면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가끔 동전을 집어주게 된다. 

  조금 한가했던 오늘, 나는 손 벌리는 꼬마 거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콜라를 나누어 마시며, 노트를 꺼내 꼬마 거지의 옆모습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녀석에게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노트 한쪽에 대충 그린, 그야말로 형편없는 그림이었지만 꼬마 거지는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녀석의 웃음은 큰돈을 받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름다웠다. 정말, 멋진 얼굴이었다. 꼬마 거지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 돈도 좋지만 내가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시간.’

<Love&Free/다카하시 아유무 글차수연 옮김/동아시아>



   일본의 괴짜 시인이자 록 가수이며 사업가란 다카하시 아유무(高橋 步) 여행기인 ‘러브 앤 프리’를 다시 읽어보면서 마음에 와닿는 울림........ 나를 더욱 진솔하게 이끌어준다. 오늘의 글, ‘꼬마 거지’란 소제목에서 느껴지는 울림은 그녀가 아무 거리낌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꼬마 거지 옆에 앉아 함께 있어준 건만도 감동인데, 거기서 꼬마 거지의 옆모습을 스케치하여 그 아이에게 주었다는 것에서도 감동이다. 꼬마 거지의 모습을 스케치하려면 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콜라를 나눠 먹으며 함께 있어주었다는 것만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글을 읽으면서 서울 변두리에 살면서, 돈암동 산언덕 한옥에 살 때에 일이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엔 초등학교는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다. 그날은 오후반이었던 나는 ‘삐걱’ 소리와 함께 대문을 열고 대문 옆 굴뚝에 몸을 녹이고 있는 아저씨 거지가 앉아 있는 옆자리에 앉았었다. 그날은 아직 초봄인지라 날씨가 쌀쌀하였었다. 아침햇살이 드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말없이 가만히 아저씨 거지 옆에 앉은 나는 아저씨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했냐고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부엌에 가서 먹던 밥과 반찬을 들고 와 아저씨 거지에게 주었다. 그 후로 자주 아저씨 거지는 대문 옆 담장에 와, 나도 아저씨 옆에 자주 앉아있었다. 

  그녀는 꼬마 거지에게 그림을 주니, 그 꼬마는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본 그녀에게는 웃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보았고, 멋진 얼굴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그 순간엔 꼬마 거지는 거지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네의 한 꼬마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다. 꼬마 거지나 그녀에게는 어떤 조건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관계였을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들의 사회에는 있는 그대로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다양한 조건에 따라서 관계가 조율되고, 구별되고, 차별화된 관계들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외모의 차이, 소유의 차이, 학벌의 차이, 지위의 차이 등등 얼마나 구별된 관계로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할지라도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에는 차별이 없다. 그것은 진리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지나가버릴 뿐이다. 그런데도 길지 않은 짧은 인생을……. 왜 그리 요란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지식을 배우고 인생을 오래 살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똑같다는 것을, 그러나 태어나서 어머니의 가슴에 묻혀 젖을 먹는 때에는 있는 그대로였다가 자라면서 가정에서부터 세상을 배우고,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고, 사회에서 세상을 배우면서 차별화된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함께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저울질하며 비교하며 상호관계(相互關係)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상생(相生)의 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상생이란 상호유익(相互有益)을 추구하는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꼬마 거지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은 그런 상생원리를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관계, 즉 서로의 존재를 존중해 주는 관계로써 보아주는 시간이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바로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다. 인간을 창조한 창조자조차도 인간의 존재를 존중하며,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들이 알았다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어른과 아이 사이에도, 직장에서도, 빈부나 학력에서도 인간의 존재를 존중한다면, 그렇게 강요나 강압, 또는 명령이나 절대적 언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의 존중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각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간섭하거나 억압하거나 강요하거나 차별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to be natural) 보아주는 것은 창조자의 창조된 모습, 즉 창조자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러했던 것이다. 자신이 늘 추구하는 ‘자신을 알아가려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남을 제대로 알아가는 길이며, 남을 제대로 알 때에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을....... 예수는 놀라운 말을 하였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한 8:19)     


  이 말의 뜻을 아는가? 예수를 알면 예수의 아버지를 알고 자신도 알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분이란 것이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2,3)     


  그러니, 그를 알면 그의 아버지를 알뿐만 아니라 그가 지은 나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안다면 그녀처럼 꼬마 거지를 있는 그대로 보며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까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찾기 위해 대학도 포기하고, 사업도 해보고, 다양한 일들을 해 왔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녀에게 진리가 다가와 준다면, 그녀는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꼭 진리를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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