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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Jun 14. 2024

5. 삶의 가치는 진실에 있다.

[自思考]

5. 삶의 가치는 진실에 있다.     


  양나라에 명장인 왕언장에 의해 전해지는 속담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호사유피, 인사유명)]     

  왕언장의 용맹함을 안 당나라 왕은 회심하기를 권하자 그는 의지를 굳히지 않고 죽으며 남긴 말이라 한다. 

  이런 말이 속담으로 남겨져서 조선시대에는 명언으로 전해오다가 오늘날에는 마치 인생에 명답인 듯 전해져오고 있다. 

  비록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도 배우는 나이에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사람이 사는 이유를 말해주는 속담이라고 생각을 해왔을 것이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이 인간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정말 그럴까?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니… 도대체 뭔 소리일까? 그리고 또 인간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무슨 소리일까? 어릴 적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어른들이 훌륭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었다. 쉽게 생각하기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라고들 말했다. 그것이 사람이 사는 의미이라고, 목적이라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들 말했다. 

  정말로 그럴까? 한평생 살다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인간의 삶의 가치란 무엇인 것일까? 오직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일까? 누구를 위한 가치(價値)인 것일까? 수많은 위인들이 이름을 남겼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아브라함 링컨이나 슈바이처 박사도 그리고 아인슈타인도 이름을 남긴 것은 틀림없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존경하는 마음으로 삶의 표본으로나 이상형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니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졌는데,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 걸까? 알고는 있을까? 

  학창 시절에는 수학여행을 가면 유명한 분들의 묘지를 돌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뉴스에 보면, 그런 분들의 묘지에 화환을 놓고 엄숙한 절을 하거나 묵념을 하는데....... 비록 영상으로 보는 우리도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이름을 남긴 탓일까? 그래서 그분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 후대에 우리들에게는 가치가 있는 듯하다. 그분들을 존경하는 마음과 뜻을 기리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이름을 남긴 그들에게는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미 죽어 흙으로 돌아갔을 뿐인데 말이다. 만일 그분들의 영령(英靈)들이 있다면, 그 영혼들은 어찌 지낼까? 아직 아무도 그 영들을 만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도 많다. 또는 종교를 가진 인간들에게는 종교에 따라서 사후(死後)에 어떻게 될지를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단지 이론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랬었다. 여러 종교 중에 하나로써 집안이 믿는 종교이니깐 따라 믿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유식한 인간은 강연에서 그렇게 말한다.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인간만이 사후세계를 생각한다고 말이다. 사실 아무도 가본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종교에는 ‘믿음’이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만이 아니다. 인간세계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고, 다양한 이념들이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만들어 내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유일하게도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거나 사고의 틀, 즉 이념들을 생성해 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무엇, 만들어낸 것이나 이념을 통해 힘, 능력, 세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중에 칼이나 총 같은 무기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나, 어떤 이념(사상)을 이끌어내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능력을 최초의 아담은 알았을까?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의 열매를 먹으려고 했었던가? 뱀이 두 사람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려서 너희가 선과 악을 아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다.”(창 3:4,5)     

  아담과 이브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뱀이 유혹해서 어쩔 수 없이 먹었을까? 그럼 왜 선악의 나무 앞에 왔을까? 그들은 이미 마음이 있었던 것일 게다. 모든 것이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그들은 풍요롭게 누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과 대화를 가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들은 뭔가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고 했을까? 그래서 한 단계 올라서려고 금지된 나무에 생각이 꽂힌 것이 아닐까? 결국 그들은 마음에 품었던 것을 뱀을 통해 행동으로 옮긴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묘하게도 그 잘못을 타인에게 핑계를 되었다. 오늘날에도 인간들, 특히 정치인들....... 얼마나 핑계를 되는가? 

  결국 아담과 이브는 진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든지 용서를 받을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의 첫아들인 가인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아담이 하나님을 시기했듯이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했던 것이다. 아니 동생의 제물만 받으신 하나님에 대해 시기했을 것이다. 가인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가인의 동생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에 가인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이냐고 핑계를 되었다. 

  그 후에 인간들은 끝없이 거짓을 무기 삼아 인간세계를 이끌어갔다. 특히 인간을 지배하는 자들은 거짓된 약속과 이념을 만들어 인간을 굴복시켜 왔다. 그것이 바로 인간세계의 맥락인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짐승이나 인간은 결국은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그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닐까? 생물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말이다. 살아있을 때에 그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나 동물들이 각각의 방식대로 생존하는 것이나 인간도 말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만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만 삶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죽은 후에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든, 인간이 이름을 남기든....... 그게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는 어찌 알겠는가? 오직 살아있는 동안에만이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럼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동식물에게는 이미 주어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존하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들 말한다. 왜일까? 인간만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니란 말인가?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종교가 아니겠는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살아있는 동안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그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인간만이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이성세계, 즉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종교의 힘이 유지되는 것인지 모른다. 만일 인간에게 영적인 세계가 없다면, 그럼 인간은 무엇 때문에 생각하고, 그 생각들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미련한 인간일수록 자신의 생각보다 타인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고 의지하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아홍수 직후에 시날평야에서 있었던 영웅 니므롯의 지배하에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었던 인간들이 바로 그러했던 것이다. 한 영웅에 복종하는 인간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 인간들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을 창조자인 하나님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봇처럼 살아가는 인간들, 자신의 의지를 빼앗기고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들....... 하나님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성,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그것을 포기한 인간을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정하거나 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만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신다면, 어떻게 사후에 인간을 심판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인간에게는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자유의지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념이, 사상이, 문화가, 전통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배하려고 하고 빼앗으려고 한다. 교육이라는 핑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진실하기보다는 거짓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맹랑한 말이 명언으로 대대손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인간의 의식을 지배함으로써 자유의지를 활용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놀라운 말이 아인슈타인의 명언에서 찾아볼 수가 있겠다.     

“보통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기억된 것을 산출해 냄으로써 그것을 생각에서 나온 줄로만 알고 있다.”     

  즉 무슨 소리인가? 인간의 의식은 각인된 의식, 사고틀(a frame of thought)에 따라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념의 노예들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쉽게 한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인간세상이 거짓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이냐?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즉 참된 삶을 살아가는 길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는 자는 참된 삶을 살아가려고 힘쓴다. 즉 진실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모든 일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사후의 심판이 있는 것이다. 왜?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따라 살아가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곧 인간의 삶의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가치란 진실해야 한다는 것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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