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생각을 담다]
모든 인간은 영원한 만족을 갈망한다. 전도서 기자는 이를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과 더 짜릿한 쾌락과 더 풍부한 지식과 더 강력한 권력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 이런 영원한 갈망을 충족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애써도 만족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포의 어거스틴은, “오, 주님이여! 주님이 주님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 심령은 주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쉬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지음>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인간들의 갈망의 역사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은 무엇을 갈망하는 걸까?
그것은 영원한 것일 게다.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려는 갈망, 재력을 무한히 소유하려는 갈망, 성욕을 끝없이 채우려는 갈망 등이 그러하지 않은가? 진시왕은 불로초를 갈망했다. 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영원을 갈망함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영원을 충족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아담과 여자가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에 그들은 영원을 상실했던 것이다.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 3:19)라고 말이다. 그 후 인간들은 탐욕의 종이 되어버렸다. 행복, 기쁨, 쾌락 등들을 모두 탐욕 안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모두 거품처럼 사라졌다. 영원의 갈망은 오직 진리 안에 해답이 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물, 동식물과 인간만은 유일하게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이란 무엇일까? 창조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생명이 있는 피조물과 생명이 없는 피조물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이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한 1:3,4)
성경의 첫 장의 첫 글에서는 이렇게 기록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세기 1:1,2)
물론 모세가 기록하였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사도 요한도 성령이 충만하여 놀라운 말씀을 기록하였던 것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이 만들어졌으며, 그분이 없이는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요한 1:1,2,3)
이처럼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모세와 요한은 분명하게 이 세상에 된 것들은 하나님, 말씀,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즉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존재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어지겠는가? 세상 만물이 생겨나는 때에를 태초(太初-천지가 시작될 때)라고 한 것이다. 천지가 시작되기 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태초 전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피조물인 인간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진화론자들은 우연(偶然-아무런 인과 관계없이 뜻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란 애매모호한 용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오직 인간에게 게시된 진리는 성경의 창세기의 첫 글과 요한복음의 첫 글에서만 태초에 대해서 인간은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초에, 천지가 시작되는 때에는 그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이 말하는 그분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를 말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분, 예수는 세상에 빛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의 빛으로 온 것이다. 여기서 생명은 사람들의 빛, 인류의 빛이라고 했다.
[In him was life, and that life was the light of all mankind.]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생명체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말하지만, 이런 생명체에는 크게 세 종류로 생각할 수가 있겠다. 식물계에는 대부분이 스스로 이동하지 않고 정한 곳에서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생물체이다. 그리고 동물계에는 정한 장소에만 극한 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이 활동을 할 수 있는 생물체이다. 하지만 유일한 인간에게는 식물과 동물과 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했을 때에 어둠과 밝음(빛), 그리고 시공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물이 나타나게 된 것은 빛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천지만물은 빛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즉 무생물체와 유생물체도 여기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간의 존재에는 이 빛 외에 다른 빛이 있었다. 그 빛은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빛인 것이다.
그 빛,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인간에게는 빛으로 인간의 근본을 알게 하는 빛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셨던 것이었다. 즉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활동하신 예수님의 공적(功績)은 인간의 생명의 빛으로써 인간의 본질(本質)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수의 공적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고, 예수를 인간이 만든 신처럼 막연하게 믿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인간적인 신처럼 인식하고 믿는 인본주의 신앙에 빠져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이는 하나님의 택함이 아닌 자들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성경의 말씀은 왜 있는 걸까? 왜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를 위해 기록하고 전하려 했을까? 왜 예수는 3년의 공생애 동안에 무엇을 가르쳤을까?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만 전하였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성경의 사복음서에 기록은 왜 했을까? 믿음의 길은 두 갈래가 있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 믿는 믿음의 길과 인간이 만든 신처럼(그리스 신화처럼) 믿는 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 양과 염소의 비유, 쭉정이와 알곡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토록 말하여도 전혀 빛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은 저들로 깨닫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깨우치는 이들은 하나님이 택한 자요, 예수를 진정 알고 믿는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늘에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니,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도록 할 것이다.」(요한 14:1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한 14: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에 대해 증언해 주실 것이다.」(요한 15:26)
이토록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생각나게 하심인 것이다. 진리 되신 예수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인본주의 신화 중에 하나인 신(神)으로 믿는 것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떻게? 진실한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에덴동산을 떠난 아담의 후예들이 무엇 때문에 영원한 갈망을 하는지를 정확히 깨닫게 될 것이다. 영원한 갈망에는 두 가지가 있겠다. 첫째는 아담이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다음 둘째는 인본주의적인 영원한 갈망으로써, 아담에게 뱀이 말한 그것, 즉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갈망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인간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갈망으로써 교만과 탐욕의 악으로써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고 군림하고 절대자처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바로 북한의 김일성의 후예들의 행동을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북한에 있는 사람들, 인민들은 그들을 태양처럼 섬긴다. 여기서 태양은 니므롯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잘 보아라! 니므롯의 제국과 북한 김일성의 제국은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은가? 왜 이런 사악한 제국을 남겨놓았을까? 그것은 바로 그 당시에 니므롯의 바벨탑을 기억하게 하시려는 것일지 모른다. 아마도 마지막 때에까지 그들을 그대로 두실 것이라고 생각된다.